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은 시(恩始)장을 보면 “덕(德)으로 원수를 갚는다(報怨以德)”라는 글이 있다.

이 글은 마치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원수를 덕(德)으로 갚으라는 뜻이다.

어느 날 제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어떤 사람(老子)이 원한을 덕으로 갚아야 한다고 했는데 어떻습니까?” 그러자 공자는 “무엇으로 은혜로운 덕을 갚을 것인가? 곧고 정직함으로 원한을 갚고, 덕은 덕으로써 갚아야 하느니라(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라는 진리의 답변을 했다.

다산 역시 야박하게 대해야 할 것을 후하게 대하며, 후하게 대해야 할 일에는 덕으로, 야박하게 대해야 할 일에는 ‘직(直)’이라는 참으로 공평한 논리를 내세우며 공자의 생각이 가장 옳은 논리라는 것을 설명했다.

그런 뜻에서 “바르고 정직함(直)이란 속이지 않음(不岡)이다”라고 풀이하고, “인간으로서 원한이 있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속이거나 기망하지 않는 것으로 갚아주면 충분하다고 여겨야 한다.”라는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그런 해석은 주자의 “이른바 직(直)이란 지공(至公) 무사(無私)이다”라는 해석과 일치하는 것으로, 원한이 있거나 원수와 같은 사람에게도 모든 일에 지공무사, 지극히 공정하고 사심이 없게만 대해주면 모든 일은 원만하게 해결된다는 생각이었다.

누구든 세상을 살다 보면 별에 별사건들을 많이 겪게 된다.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 분하기도 할 것이고, 그 분함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해 속 앓이를 하기도 한다.

그런 일들의 추억이 무수히 떠오른다. 그 떠오르는 추억을 돌이켜 생각해보았다. 분하고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그것을 안겨준 상대에게 마구 퍼부은 말들을, 그러나 뒤돌아서면 후련한 마음보다는 차라리 훌훌 털어버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무거움과 후회가 남을 뿐 시원하게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최근에 영등포구 시의원으로 출마한 더 불어민주당 후보(3선)가 ‘국무회의도 거치지 않고 청와대가 작성한 개헌안은 절대 통과되어서는 안 된다’는 필자의 칼럼을 보고 ‘혹세무민(惑世誣民. 사이비 종교인으로 세상을 어지럽힘) 아닌 가요’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처음에는 피가 쏟을 만큼 분했다. 인격모독은 물론이지만 그 의원의 인격에 대한 배신감을 갖는 충격이 더 큰 것 같았다.

서울시의회 건설위원회 위원장까지 지낸 영등포구 3선 의원으로서 평소에는 친절하고, 예의 바른 사람으로 행동했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지지도가 올라가고, 당의 지지도까지 덩달아 상승하면서, 마음이 교만해지며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

영등포구 당선을 확신하며 전에 없이 유권자에게 건방지고, 안하무인이다.

어르신을 대하는 공손함도 없어졌다. 더 불어민주당에서는 의석 확보를 위해 이런 자를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후보로 내세웠다. ‘더 불어민주당사’에 가서 항의를 하고자 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오히려 민주당에서는 ‘문재인을 지킨 충성된 종(犬!)’으로 인정받을 것 같아, 그마저도 하지 못하고, 분(忿怒)을 삼키려다 문득 이성계와 무학 대사가 주고받은 말이 떠올랐다.

‘자신의 마음과 같이 보인다는 것’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그런 논리로 치면 그 의원이야말로 ‘혹세무민’이 아니던가.

지내 놓고 보면 그 의원은 당에서 힘깨나 쓴다는 국회의원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아부하고, 별 볼
일 없는 유권자들에게는 함부로 대하는 위선자였음이 드러난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상당수의 유권자들에게 그 의원의 본색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후보는 대통령지지도와 당의 지지도와는 엄격히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하는 데, 인품과 상관없이 ‘정당’만 보고 찍는다는 게 문제다.

다선 의원의 경우 경륜도 있지만, 교만해진다는 단점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꼭 그렇게 정의롭게만 되지 않는 것 같다.

유권자들이 자신의 한 표가 얼마나 귀중한지를 알아야 한다. 순간 세상을 물(水)처럼 살아야 한다는 노자의 말씀이 떠오른다.

노자는 남과 다투거나 경쟁하지 않는 부쟁(不爭)과 남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임하는 겸손(謙遜)을 가르쳤다.

물과 같이 만물을 길러주고, 키워주지만 자신의 공(功)을 남과 다투려 하지 않는 것이고, 낮은 곳에 임하기에 ‘강’이 되고, ‘바다’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 밖에도 노자는 물의 정신을 일곱 가지로 예찬한다. ‘낮은 땅에 즐겨 임하고(居善地),연못처럼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心善淵), 아낌없이 누구에게나 은혜를 베푼다(與善仁), 말은 훌륭하고 믿음이 있으며(言善信),깨끗하게 다스려지게 하고(正善治) 일을 맡으면 잘 융화하여 처리하고((事善能), 움직임은 옳다고 여길 때를 고른다(動善時)는 것’ 이다.

바로 수지칠선(水之七善)이다. 노자의 말대로 물처럼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중생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공을 내세워 자랑만 하려고 하고, 남을 깎아내려, 헐뜯고, 험담하면서 그 위에 군림하려는 것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다.

그래서 속세에서는 늘 지옥처럼 아귀다툼이 끊임이 없을 정도다. 남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이 가장 오래가는 높은 곳일 수도 있는데, 중생들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성경에도 높임을 받으려면 낮은 자가 되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흐르는 물처럼 순리대로 살라는 것이지만 상선약수(上善若水)의 정신도 함께 생각해 봤으면 하는 마음이다.

물론 보통사람이 그렇게 되기까지는 힘들겠지만 그것은 사사로운 나를 이기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그 시의원의 인격수준에서 ‘그럴 수 있니?’(부정적)라기 보다 ‘그럴 수도 있겠구나!’(긍정적)하는 생각을 하니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물처럼 마음도 가벼워지는 것 같다.

보복의 악한 마음으로 저주하거나 행동하면, 마치 수레바퀴가 지나간 자리에 자국이 남듯이 편안한 마음보다는 오히려 죄와 괴로움이 따를 뿐이다.

“덕(德)으로 원수를 갚는다(報怨以德)”는 노자의 말을 교훈으로 새겨듣고 싶다. 심판은 유권자의 몫이자 하늘의 뜻이다.

[호 심송, 시인. 칼럼니스트. 방송패널. 한국 심성교육개발연구원 원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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