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눈을 깜박인 것 같은데 벌써 절반의 한 해를 넘어서고 있다.

문득 숨 가쁘게 내달린 인생에서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을 시로 표현한 14세기의 단테가 떠오른다.

단테는 ‘신곡’이라는 시의 첫 구절에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란 여정의 한가운데서, 나는 내 자신이 어둔 숲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곳은 내 삶을 위한 최적의 길이 숨겨진 장소다.’ 맞는 것 같다.

이건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다. 단테는 살아서는 아무도 가 본 적도 없는 지옥. 연옥. 천국의 모습을 오로지 시인의 상상력만 갖고 1만 4,000행의 시를 남겼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단테의 신곡을 제대로 탐독하지는 못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 같다.

유명한 스님이 토굴을 지어서 도를 닦으며 수행을 하고 있었다. 많은 제자들과 지인들이 자주 찾아와 설법을 들었다. 스님은 그것이 번거로워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아무도 찾지 않는 움막에서 좌선을 하니 참으로 조용하고, 마음이 평온했다.

그야말로 극락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침 나물을 캐러 왔다가 내려가던 여인이 스님을 보았다. “스님은 왜 깊은 산중에서 혼자 사시나요?” 스님이 답했다. “조용한 곳에서 수행을 하며 공부를 하려고 왔지요.” 그러자 여인은 되물었다. “스님 산속에서 흐르는 계곡의 물과 새 소리는 안 시끄럽습니까?” 스님은 그 여인의 말 한마디로 할 말을 잃고 여인이 떠나간 후에도 한참을 앉아 있었다.

‘물소리, 새소리는 안 시끄러운가?’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어딘들 시끄럽지 않은 곳이 있을까? 산꼭대기, 깊은 계곡에 있는 다고 시끄러움을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장소가 중요한 게 아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 스님은 그 여인의 말에 깨달음을 얻고, 하산하여 자신의 일에 정진하며 수행을 했다. 또 그 말이 평생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며 더 좋은 조건이 마련되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어느 조건이 형성되던 자신의 욕망을 만족 시킬 수 있는 것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환경이나 조건이 바뀐다고 불행이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 지금 내가 갖는 것에서 불행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고 만족한 순간이다.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이 벌어지든, 자기 마음에 달렸다.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정진하는 스님이 한 여인이 ‘새소리, 물소리는 시끄럽지 않느냐’는 물음에 새소리, 물소리까지 시끄럽게 느낄 수 있다며 하산을 했다.

물론 그로 인한 깨달음으로 유명한 스님이 되어 설법을 하고 계시지만, 역(逆)으로 생각해보았으면 또 다른 깨달음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고요한 산속에서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 조약돌 사이로 흘러가는 물의 유연함이 마음속에 들어차면서 평온함을 느낄 수 있지 않았을까. 새소리를 들을 때도 마찬가지다.

각종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듣는 동안 새가 앉은 나뭇가지, 새의 부리, 깃털, 몸집의 크기, 울음의 높 낮은 소리 등등 새들의 모든 것을 보고 듣게 된다. 조용히 눈을 감고 새소리를 듣는다.

그러면 새가 내 마음속에서 앉고, 날갯짓하고, 새소리를 고스란히 경험하며 일심(一心)의 마음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같은 이치는 내 내면에 또 다른 존재의 공간이 생겨나는 것을 체험하며 수용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 공간이 매우 넓고 새롭다는 것도 깨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세속의 찌든 삶을 사는 중생들이 집중하고 골몰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마음은 구름처럼 가볍게 잘 흩어지고, 바람처럼 빠르게 이동한다. 그래서일까. 불가에서는 어미 닭이 알을 품듯, 고양이가 쥐를 잡듯, 지금의 순간에 집중하라고 설법을 한다.

어미 닭이 알을 품되 알의 온기가 늘이어지도록 품는 것처럼 하고, 고양이가 쥐를 잡을 적에 생각과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매일을 바쁘게 살고 있고 내 몸 하나 챙기기에도 벅차다. 날카로운 언어를 주고받고, 또 모욕감을 느끼기도 하고, 분(忿)할 때도 많다.

이럴 때는 흔한 말로 전원을 잠시 꺼두어야 한다. 나를 느슨하게 하고 단조롭게 해야 한다. 펼쳐진 것을 때로는 접어둘 필요가 있다. 접으면 잠잠해지고, 잠잠해지면 마음에 풋풋하고 넉넉한 공간이 생겨난다. 자신의 건강유지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다.

다시 단테의 ‘신곡’을 생각해 본다. 지옥에선 버려야 할 악행을, 연옥에서 죄업을 씻어내는 과정을, 천국에서 지향해야 할 삶의 방향을 느낄 수 있다.

이 신곡을 통해 우리는 살아생전 지은 죄로 벌을 받는 영혼을 만나게 된다. 애욕, 나태, 교만, 질투, 낭비와 인색이라는 죄로 고통받는 사람들, 그들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눈만 뜨면 매일 만나게 되는 인간 군상들이자 바로 나 자신일 수도 있다. 두렵고 무섭기까지 하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자신만이 옳다고 고집한 적은 없었는지, 말을 함부로 해서 혹이나 마음에 상처를 입힌 사람은 없었는지, 생각해보자.

바람은 풀밭에 가면 풀의 몸이 되어 흔들거리고, 나무에게 가면 나뭇가지가 되어 흔들거린다. 바람이 이처럼 풀이되고, 나뭇가지가 될 수 있는 것은 ‘나’라는 완고한 생각을 버렸기 때문이다.

‘나’ 라는 것을 버리면서 다른 것에 맞췄기 때문에 풀도 되고, 나뭇가지도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것에 맞출 수 있는 것은 집착을 버렸기 때문이다.

내 내면에 다른 존재의 공간을 만들고 비우는 연습을 하다보면 나를 에워싸고 있는 또 다른 것에 대해 알게 될 것이다.

나(自我)를 구성하고 있는 배음(背音), 나의 기다림, 조용함, 쓸쓸함, 즐거움 같은 것을 잘 이해할 수도 있다. 내가 다른 것이 되어 나를 다시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보자.

그러는 동안 우리의 마음이 계곡의 맑은 물소리에 회복되고, 맑은 날의 새소리에 회복되어 밝고 맑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어느 누구라도 지옥에 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천당과 지옥은 먼 곳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다.

[호 심송, 시인. 칼럼니스트. 방송패널. 한국 심성교육개발연구원 원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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