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이 바뀌었어도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

오히려 국민들은 보복정치와 안보 무지에 위기의식을 느끼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참으로 대책이 없고, 그런 정권이 탄생된 것이 기가 차다. 어느 하나라도 믿음과 신뢰가 가는 게 없을 정도다. 다수의 국민들이 후회한다.

사람은 누구라도 어두움, 실패, 질병, 죽음 등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이 세상을 살아간다.

그 같은 두려움 때문에 자신이 세운 목표를 향해 마음껏 도약하지 못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실패의 두려움, 거절이나 거부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때로는 우리의 용기를 빼앗아 간다.

똑같은 아침이슬을 마셨지만 벌은 달콤한 꿀을 만들어내지만 뱀은 생명을 끊을 수 있는 무서운 독을 만든다.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의 말도 그렇다. 어떤 이에게는 힘이 되기도 하지만 또 어떤 이에게는 깊은 상처가 될 수도 있다.

작은 불씨 하나가 숲을 태울 수 있는 파괴력을 갖고 있듯 자칫 잘못 혀를 사용하면 무서운 독이 되어 자신은 물론 남도 파멸시킬 수가 있다.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하지만 상대방 인격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에서 절제된 언행이 이루어져야 한다. 내가 무심코 한 말이 다른 사람에게 용기와 힘을 줄 수 있는 지, 상처를 주게 되는 것인지는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하다보니 요즘 들어서는 말의 타락 정도가 위험수위를 넘나들고 있을 지경이다. 해야 할 말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음에도, 우리는 절제되지 않은 부적절한 표현으로 남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기도 한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이는 긍정적인 사고와 부정적인 사고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깊은 시간, 창밖에 드리운 어둠 속에서 불현듯 망망한 대해(大海)에서 혼자만 있는 기분으로 외로움과 두려움이 역습한다.

태양이 뜨는 한낮이면 별이 보이지를 않는다. 그러나 밤하늘의 별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별은 그대로 있을 뿐이다. 세상이 어두워지면 별은 다시 그 자리에 떠서 밝은 빛을 밝힐 것이다.

27년 전 세브란스 병원에서 임상 목회 인턴과정 시절, 암 병동에서 암 환자들을 만나 상담을 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죽음은 결코 두려운 게 아니라고 말은 하지만 내심으로는 우울해질 수밖에 없었다.

필자 스스로가 죽음에 대한 확신이 없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명쾌한 해답을 줄 수 없었기에 병실을 나서면서 많은 눈물을 흘려야만 했다.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두려움은 무엇이 있으며 왜 생기는 것일까? 두려움이 역습해 올 때 미래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 같다.

몇 해 전 우리나라 유명 산악인 세 명이 히말라야 등정 중 불의의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암벽을 타는 사람들은 밧줄에 자신의 생명을 맡긴다. 그러면서 높은 곳을 향해 죽음을 무릎 쓰고, 암벽타기를 한다.

그들은 암벽을 타면서 두려움이 역습해 올 때마다 한결 같이 밧줄을 생명줄로 알고, 밧줄을 꼭 잡는다. 희망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을 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그 같은 두려움의 극복을 위해서는 목적을 바로 이해하고 나아가야 한다. 목적이 분명하면 용기가 생기게 된다. 분명한 목적이 있으면 두려움을 극복하는 용기를 제공한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두려움은 외적 조건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여건 속에서도, 어떤 사람은 초연하고, 또 어떤 사람은 좌불안석이 되어 초죽음이 될 정도로 두려움에 떨기도 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 두려움과 평온함은 외적 환경의 차이가 아니라 마음의 차이에서 온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볼 수 있다.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바로 믿음에 달려있다.

갓난아이는 자신이 먹고 차야 할 기저귀에 대해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부모가 걱정해야 할 일이다. 또한 아기는 엄마가 보이지 않아도 방안 어디엔가 있다고 믿으면 아이는 평안한 마음으로 잘 논다.

마찬가지로 어떤 상황에서든 확실한 믿음만 있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믿음만 확실하면 두려움과 염려는 사라지게 되어 있다.

새 아침이 밝아오는 이른 새벽, 가만히 지난 세월을 돌이켜본다. “누구든지 아침을 맞이하지만, 내게 그 아침을 맞이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란 말이 떠오른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이 갖고 있지 않은 감성을 갖고 있다. 분노, 욕심, 사랑은 다른 미개한 동물들에게도 있다. 그러나 인간은 웃음과 이해, 포용력이 있다. 특히 아름다운 감성의 눈물을 갖고 있다.

인간이 인간답게 본래의 마음을 찾아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산다면 그만큼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 것도 존재하는 것이 있다. 또한 눈에 보이는 것은 현상에 불과하고, 일시적일 수가 있다.

알고 보면 이 세상은 두렵고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니다. 힘겨운 일, 고난의 상처들도 지나고 보면 모두가 다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는다.

이제 두 주먹 펴고 빈손으로 가는 여유로움. 그러면서도 문득 떠오르는 것은 나의 옷들엔 주머니가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이제 한 해가 저무는 시각에 내 마음의 욕심이란 주머니를 털어내고, 비우고, 없음의 여유로움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나(自我)로부터 출발하여 오랫동안 먼 외부를 떠돌다, 다시 내게로 돌아와 고요해지는 일, 그것이 인생 한 바퀴가 아닐까.

나 아닌 것들에 현혹되어, 나 아닌 것들을 돌아보며, 욕심으로 떠들썩하게 살다가 돌아와 70년이 되어서야 부패 된 내 안을 들여다본다.

믿음과 확신이 확실하게 서 있고 담대하면, 두려움은 없다. 생각이 깊은 사람은 빠져 죽을 만큼 깊은 고요가 자기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믿음의 시작은 염려의 끝이요. 염려의 시작은 믿음의 끝이다.” 조지 뮬러의 말이다.

[호 심송, 시인. 칼럼니스트. 방송패널. 한국 심성교육개발연구원 원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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