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선여경(積善餘慶)-착한 일을 많이 행하면 경사가 따른다.

선행을 권장하는 말은 많다. 마음을 바르게 쓰면 신명(神明)도 알아 보살핀다는 ‘마음 한번 잘 먹으면 북두칠성이 굽어보신다.’ 는 속담도 있다.

금언과 명구를 모아 놓은 저서 ‘명심보감’(明心寶鑑)에도 좋은 말이 빠질 수 없다. ‘강태공’이 말한 것으로 나오는 견선여갈(見善如渴), 일명 ‘장자’ 의 말이라고 한 ‘일일불념선 제악개자기(一日不念善 諸惡皆自起 : 하루라도 착한 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여러 악한 것이 모두 저절로 일어난다.)라는 말도 있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태초부터 인간은 더불어 살도록 지음을 받았고,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는 서로에게 베풀며 더불어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축복인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상대방을 축복하고 그 축복으로 하나님의 평안을 이루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토록 우리에게 소외되고 가난한 자를 위해, 이방인을 위해, 그들과 더불어 살라 하신 것이 아닌지 모른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뿐만 아니라 미운 자들과도 함께 해야 한다. '더불어 함께 산다.'는 것은 입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그들과 '더불어 함께' 사는 것이며 선행을 베푸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처럼 베풂과 나눔으로 살아야 한다.

결국 더불어 산다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 다가가며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는 것이다.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 조건 없는 선행을 베풀어야 한다는 말이다.

한 일화가 생각난다. 중국으로 건너간 달마대사가 양나라 무제를 만났을 때 일이다. 나라 안에 엄청난 수의 사찰(寺刹)을 세웠던 무제가 달마대사를 만나자 우쭐하는 마음에서 "나의 공적이 얼마나 되는가?"하고 물었던 것이다.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과연 달마대사가 무슨 말로 대답을 할 것인지 궁금해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예상외로 달마대사의 답은 아주 간단했고 명료했다. "무공덕(無功德)입니다" 불교에서는 선업(善業)도 ’업‘이고, 악업(惡業)도 ’업‘으로 보고 있다. 행함도 한 바가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의 짐으로 ’업보‘(業報)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달라이라마는 "오른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다.

성경에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것도 결국 이와 마찬가지로 일맥상통한 것이라 생각된다. "좋은 일은 남몰래 하라"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이 그리 만만치는 않은 것만 같다.

좀 더 말을 하자면 '남몰래'가 아니라 '나 몰래'라는 표현이 더 옳을지 모르겠다. 핵심은 내 마음에 남음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렸다. 즉, 선행을 했어도 할 일을 했다는 마음의 흔적이 남아 있다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알게 된다는 것이다.

두 주먹 불끈 쥐고(욕심) 태어나면서부터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려갔지만 떠날 때는 두 손을 펴고(허심) 가는 우리네 인생이다.

그런 인생이기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온전히 멈춰 본 적이 없다.아울러 멈춘다는 것에 대해 커다란 두려움을 갖고 살며 자신을 뒤돌아 볼 기회도 없었다.

그런데 석가모니는 그런 인간을 향해 멈추라고 한다. 왜 멈추라고 했을까? 여기서 석가모니가 멈추라고 한 것은 우리에게 숨 쉬는 것을 멈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內)에 내재되어 있는 고질적인 '에고'(ego)의 멈춤을 말하는 것이다.

중생들이 세상 삶 속에서 낙오되고 실패를 할까, 두려워 멈추지 못하지만 멈추는 그 순간 지혜가 샘솟아 나는 것이다. 내가 멈출 때 비로소 '나'라는 테두리가 없어지면서 내가 무한한 우주에 꽉 찬다는 논리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우리에게 멈추라고 한 것이다.

예수님도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했다. 내 이웃이 내 몸과 같이 느껴질 수 있을 때 비로소 '나'(自我)가 멈추는 순간이 되는 것 같다. 이는 그 순간 이웃이 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리라.

결국 예수의 사랑도, 석가의 자비도 마찬가지다. 모두 ‘나’ 가 멈춘 자리에서 선행을 베풀 수 있는 거다. 그래서 멈추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옛 속담에 '광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베풀고 나누는 것은 있고 없음의 문제가 아니다. 주위를 살펴보면, 돈이 없어도 베풀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게 얼마든지 많다.

필자의 지우 중 사업을 하는 분이 계시다. 그분은 늘 필자에게 “이번 사업만 잘되면 내 ‘몇천’ 딱 떼어 기부하겠소.”라고 말했지만 한 번도 약속이 지켜진 적이 없다. 그 지우는 사업이 잘된다 해도 평생 후원금을 낼 수 없다.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이다. 더 벌고 싶은 욕망 때문에 후원금을 낼 수 없는 것이다.

선행을 베푸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어리석은 부자에게 한 말씀을 깊이 생각해보자.

이 말씀은 부자가 생각하고 있는 가치기준이 참가치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며, 동시에 물질만능주의, 배금사상에 빠져있는 현대인들에게 주는 좋은 교훈이기도 하다. 아무리 물질이 풍족하더라도 영혼을 빼앗겨 버리는 그런 어리석은 부자는 가장 불행하고 가련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옛 선인들이 추수 때 들녘에 가난한 자들을 위해 곡식 낱알을 남겨 놓듯 이웃을 위해 남기는 미덕을 보이며 따뜻한 관심을 보이는 우리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 안타깝게도 작은 일은 크게, 가벼운 일은 무겁게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베풀 수 있을 때 베풀고 나누자. 그리고 멈추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남겨두는 즐거움도 만들자.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베푸는 삶을 사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깊은 의미를 알아야 할 것 같다. 나의 재물이란 내가 쓴 것일 뿐, 남은 것은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이다.

최근에 페이스북의 창업자 ‘주커버그’가 52조 원을 딸을 위해 사회에 내놓겠다고 해서 전 세계에 감동을 안겨준 적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1억 원 이상의 고액 기부자 모임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이 작년 말 기준 1,000명이 넘는 것으로 밝혀진 바 있다.

더욱 감사한 것은 이들 중 상당수의 자녀들까지 기부에 동참한다고 알려져 선행의 대물림이 이뤄진다고 보도되었다는 사실이다.

옛말에도 “뿌린 대로 거둔다.” 고 했다. 하나하나 선행이 모이고 쌓여져 저들의 자손까지도 큰 축복이 나리기를 소원해본다.

[호 심송, 시인. 칼럼니스트. 방송패널. 한국 심성교육개발연구원 원장.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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