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병신년 한 해가 가고, 정유년 새해를 맞이했지만, 여전히 기분이 우울하고 공연히 서글퍼짐에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런 자신을 발견하면서 삶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기도 한다.

우리는 간혹 ‘자신이 무엇 때문에 왜 사는지’를 생각할 때가 있다. 이 같은 생각은 세상 사는 일이 힘들 때 대체로 그런 의문을 자신에게 스스로 던져보지만 힘든 것 자체보다는 문제의 해결을 위한 명확한 답을 구 할 수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럴 때마다. 떠오르는 글이 있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셰익스피어의 대표작 ‘햄릿’ 3막 1장에 나오는 주인공 햄릿의 독백이다. 셰익스피어는 잘 몰라도 누구나 한 번쯤은 읊어 본 대사로서, 삶의 막다른 골목에 처했을 때 푸념처럼 내뱉기도 한다.

영어로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이다. 지금 우리는 선왕의 죽음을 놓고 괴로워하던 햄릿보다 몇 배 더한 깊은 고뇌에 빠져, 말 그대로 죽느냐 사느냐의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매고 있다. 비상식이 상식을, 불의가 정의를, ‘악’이 ‘선’을 짓누르고, 활개를 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국정 농단을 탓하는 촛불시위로 유폐된 박 대통령은 둘째다. 야당은 물론 여당까지도 제 살 궁리만 하며. 막무가내로 박 대통령을 죽이기 위해, 별에 별것을 다 헤집고 있다.

광화문광장 시위로 상가가 적자운영이 되어도, 기업들이 년 말 행사를 통해 매출 신장을 하려 해도 방송매체가 촛불시위만 하루 종일 중계방송을 하다 보니, 채널을 확보하지 못해 매출이 떨어져 울상이 되었어도, 나만 살기로 혈안이 되어있다.

한 정치꾼은 마치 자신이 대통령이라도 된 것처럼 위험천만하게 미친개가 짖듯 떠들어댄다. 국정 농단보다 더 험악하고 높은 산이 우리 앞을 가로막고 있다. 한술 더 떠 지난 12월 집회에는 횃불이 등장하기도 했다.

세월호 참사 발생 일을 상징하는 416개 횃불이 청와대 100m까지 진출했다. 구호와 시위 문구도 달라졌다. 박 대통령 하야와 퇴진이, ‘즉각 퇴진’과 헌재의 ‘조속한 인용’으로 이어지고 심지어는 구속까지 강요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자인 총리의 퇴진까지 촉구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황 총리가 부역 인사라며 황 권한 총리 대행을 부정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사법부의 독립성을 침해할 소지가 있고, 촛불시위가 정치화의 수단으로 변질될 것으로 우려된다.

과거 좌파세력인 통진 당을 해체 시키고, 민주인사들(?)을 억압했던 대표적인 공안검사이자 친 재벌 부패 법조인이라고 낙인찍고 자기 입맛에 맞는 여론재판으로 몰아가는 것은 매우 부적절한 처사다.

물론 민주 자유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탄핵에 대한 찬반 의견을 표시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헌법적 자유에 속하기 때문이다. 모든 재판은 신속과 공정이 핵심이자 원칙이다. 어느 한쪽에 너무 치중하다 보면 다른 하나의 가치를 훼손시킬 수도 있다.

그래서 법원의 상징이 저울이다.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지 말라는 뜻이 담겨있는 것이다. 과거와 달리 시위 분위기를 ‘축제 분위기’로 바꾸면서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의 참여를 이끌어 냈다.

문제는 청소년, 특히 대학생들의 경우도 탄핵 피켓을 들고 있으면서도 탄핵해야 하는 분명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부 청소년, 대학생 심지어는 유명 연예인들이 출연하는 공연이 있어 분위기도 보고, 공연도 보기 위해 나왔다고 한다.

대부분이 의미도 모르는 채 나와 숫자만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달라진 것은 ‘최순실 게이트’가 슬그머니 사라지고, ‘박근혜’라는 이름만 남아 정적들과 언론에 처절하게 씹히고 있다.

정치권과 언론사의 계속된 선동으로 국민들은 분노하며 서울 도심에서 촛불시위를 하는 것도 부족해 여의도에 있는 새누리당사 앞에서 새누리당 해체를 강력히 요구하면서 당사 벽과 현수막에 달걀을 던져 얼룩지게 만들고, 흉악한 조형물을 만들어 흔들며 경찰들을 불안에 떨게도 했다.

안타까운 것은 그동안 특검의 경우 요란스럽기만 했지 정작 사실로 밝혀진 것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청문회에서 우 수석이나 기업인들 박 대통령하고 엮으려고 했지만, 싱겁게 끝났다. 그러나 대중의 야유 속에서 분노 왜곡 보도하는 언론의 자세는 여전하고, 개선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권력의 편에서 언론은 어떤 존재로 언제까지 지탱하려는 것인지, 우리에게 정치권과 언론은 아직도 상식 이하의 구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등 그들로부터 농간을 당하는 국민임을 스스로 자책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서글프다.

일반적으로 상식이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갖고 있거나 알고 있는 지식이며 판단 능력을 말한다. ‘지식과 무식’과 ‘빈부차’를 떠나 어느 누구에게나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것을 말한다. 그런 상식은 우리가 조직집단으로 살아가기 위해 정해놓은 최소한의 규칙과 제도다.

그 규칙만 잘 지키면 우리는 상식이 통하는 세상에서 살게 되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정의와 선’은 어디로 실종된 것일까? 태극기를 들고 탄핵반대를 하는 시위대도 국민인데, 촛불을 들고 분노하는 시위대만 국민이고, ‘국민의 소리’라는 것은 좀처럼 이해가 안 된다.

또 탄핵반대 시위대가 보수단체라면 탄핵 찬성하는 시위대는 진보단체란 말인가. 아닐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우려되는 것은 그 촛불의 불씨가 어둠을 밝히기는커녕 자칫 커다란 화재를 일으켜 건물들을 다 태울까 우려된다. 파스칼은 말했다.

인간은 천사도, 짐승도 아니라고, 천사처럼 되고자 하는 사람이 짐승 같은 짓을 저지르는 것이야말로 불행이 가장 바라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고통에 시달릴수록 그 고통을 덜어줄 희생양을 찾고자 하는 강한 유혹에 직면하기 마련이다.

진정 자유로운 인간은 아무에게도 책임을 전가하지 않은 채 자신의 분노를 뛰어넘는 사람이다. 이제부터라도 폭력의 씨앗이 될 수 있는 두려움, 무지, 집착, 편견의 독소들을 각자의 마음속에서 끄집어내 버려야 한다. 특정 세력의 힘에 눌려 판결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신들은 눈 가리고 아웅 식이지만 국민들은 다 알고 있다.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는 정치꾼들, 강성 귀족노조, 정도가 아니라 국민을 선동적으로 유도하는 언론, 그리고 이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종북 세력들, 박 대통령을 두둔하고 정치를 잘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느 지인의 말처럼 임진왜란 때도 의병들은 임금과 양반을 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았고, 3.1운동 때도 백성들은 조선 왕조를 위해 싸우지 않았고, 6.25 전쟁 때 역시 이승만 대통령을 위해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오직 내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다.

지금도 그때처럼 내 조국을 지키기 위해 태극기를 들고 탄핵을 반대하는 것이다. 작금의 사태를 방치하면 이 나라는 수령에 빠질 수밖에 없다. 광우병 촛불이 그랬고, 세월호 촛불이 그렇고, 이번 탄핵 촛불도 그렇다. 아름다운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해서도 탄핵은 반드시 기각되어야 한다. 상식의 양심을 지키며 태극기를 들고 애국가를 부르자. 승리의 그날까지.

[시인. 칼럼니스트. 한국열린사이버대학 실용영어학과 특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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