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시대의 양잠1

경북대학교 윤재수 명예교수
중종은 조선 제 11대 왕으로 1488년 음력 3월 5일 성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정현왕후 윤씨이다. 이름은 역(懌)이고, 자는 낙천(樂天)이며, 연산군의 동생이다.비(妃)는 좌의정 신수근(愼守勤)의 딸 단경왕후(端敬王后)이며, 제 1계비는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이고, 제 2계비는 영돈령부사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1506년 9월 박원종, 성희안 등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위 시킨 다음 왕으로 추대되었다. 중종은 연산군 때의 여러 가지 폐정을 개혁하기 위하여 홍문관을 강화하는 동시에 과거제도를 엄중히 시행하는 등 폐정개혁(弊政改革)을 단행하였다.

특히 중종 10년(1515) 신진사류인 조광조를 등용하여 사림파를 중심으로 한 도학정치를 시행하려 하였으나 이들 신진세력의 과격하고 지나친 개혁정치는 기성훈구파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가 일어나 개혁정치의 기운이 서서히 사라지고, 심정 등 훈구파의 전횡이 자행되면서 중종 대(代)는 정치적인 혼란이 계속되었다.

중종 대는 정치적으로 조선 전기에서 후기로 이행하는 과도기적인 시기로 훈구세력과 신진 사림세력의 갈등, 훈구세력 상호 간의 갈등 및 훈구세력과 척신세력 간의 세력다툼 등이 동시에 일어났다. 중종 5년(1510) 4월에는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나 경상도 해안 일대가 막대한 피해를 입자 왜구에 대비하기 위하여 비변사를 설치하였다.

사회면에서는 유교주의적 도덕윤리가 정착되어 갔고 향약이 전국적으로 유행하였다. 중종 11년(1516)에는 주자도감(鑄字都監)을 설치하고, 동활자를 만들어 천하여지도(天下與地圖), 삼강ㅎ행실(三綱行實), 1530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9년 이문속집집람(吏文續集輯覽) 등 역사, 지리, 언어, 문학, 사회 각 방면의 문헌들이 간행되었다.

경제면에 있어서는 저화와 동전을 사용하기 위한 연구개발에 힘쓰게 하였다. 1544년 11월 15일 창경궁의 환경전에서 재위 39년 만에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능은 광주(廣州) 정릉(靖陵)이다.

중종시대에도 친잠의 예가 행하여 졌다. 중종실록 18권, 중종 8(1513)년 3월 25일 갑오 2번 째 기사에 전교하기를, "졸(卒)한 영의정 유순정(柳順汀)은 원훈(元勳)인 수상(首相)이므로 발인이 내일에 있다면, 친잠(親蠶)의 성례(盛禮)를 행함은 미안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례(大禮)를 중지할 수는 없으니, 수하(受賀)와 노주연(勞酒宴)등의 일을 어떻게 처리하랴? 예조로 하여금 의계(議啓)하도록 하라."하니, 예조가 회계하기를, "상께서 원훈 수상의 발인으로 이와 같이 염려하시니, 전교하심이 매우 지당합니다. 그러나 대례를 이미 택일하였으니 실로 이 때문에 물릴 수 없으며, 이미 대례를 행한다면 수하 또한 물릴 수 없습니다. 노주연은 예문(禮文)에 친경(親耕), 친잠(親蠶)을 행한 이튿날에 한다.’ 하였으니, 노주연은 27일로 물리는 것이 어떠하리까?" 하니, 전교하기를, "수하를 내일에 하려면 곡연(曲宴)과 노주연(勞酒宴)도 모두 내일 행하라."하였다. 라는 내용으로 보아 친잠의 행사는 대례로서 수상의 장례가 있어도 미루지 아니하고 시행하였다.

또한 친잠의 례를 시행한 후 임금이 하례를 받는 수하(受賀)의 의(儀)도 연기하지 아니하고, 임금이 위로의 술을 내려 베푸는 잔치인 노주연(勞酒宴)과 궁안에서 임금이 베푸는 소연인 곡연(曲宴)도 연달아 행하졌음을 알 수 있다. 양잠은 국가의 주된 산업으로서 풍잠(豊蠶)을 염원하는 친잠의 예가 중요시 되었다.

중종실록 18권, 중종 8(1513)년 4월 28일에는 내양잠(內養蠶)의 생견(生繭)을 정부(政府) 정원(政院)에 반포하고, 이어 전교하였다. "내가 옛글을 보건대, 누에를 길러 생산한 고치를 모든 귀신(貴臣)에게 나누어 내리니, 이는 근본을 힘쓰는 뜻이었다. 근자에 내양잠견(內養蠶繭) 약간을 정부 정원에 내려 근본을 힘쓰는 나의 뜻을 보이니, 궁중 양잠의 공을 사례하지 말라."하였다.

중종실록 28권, 중종 12(1517)년 6월 22일에 대간이 “국가가 잠실(蠶室)을 두는 것은 곧 농사를 힘쓰는 아름다운 뜻입니다. 그런데 근자에 잠실에 관한 일을 보면 설립한 본의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폐가 또한 적지 않습니다. 뽕을 딸 때에 여염집을 드나들면서 함부로 빼앗으므로, 민가에서는 춘잠(春蠶)을 할 수 없고 가축도 편할 날이 없는데, 또 새 잠실을 두어서 그 폐를 더하고 있습니다. 다 혁파할 수는 없다 해도 새 잠실은 없애 버리소서."하였으나, 전교하기를, 새 잠실에 관한 일은, 선왕조에서 전지까지 주어 뽕나무를 심게 한 것이니 양잠지(養蠶地)를 지금 혁파할 수는 없다.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중종 임금은 양잠을 중요정책으로 삼았다.(국사편찬위원회, 중종실록 인용 및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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