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임금과 양잠4

경북대학교 윤재수 명예교수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예승석(芮承錫)이 양잠 도회소(養蠶都會所)에서 수납(收納)한 명주실을 바쳤는데, 검은 칠을 한 상자(箱子)에 담았으므로 전교(傳敎)하기를, "상자가 비록 하찮은 물건이지마는 또한 백성의 물력(物力)에서 나왔으니, 그것을 감사(監司)에게 유시(諭示)하여 이 후에는 이와 같이 하지 말도록 하라."하였다.

물건을 수납할 때 고급스럽게 포장하면 농민의  부담이 크므로 허락하지 아니하는 조정의 배려가 였보였다. 성종 7(1476)년 8월 22일 임진(壬辰) 5번째 기사에는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후비(后妃)의 친잠(親蠶)하는 예(禮)를, 예문관(藝文館)으로 하여금 구례(舊例)를 상고하여서 아뢰도록 하라."하였다.

성종 8(1477)년 윤2월 24일 임술(壬戌) 3번째 기사에는 예조에서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의 서례(序例) 안에, ‘계춘(季春)의 길사(吉巳)에 선잠(先蠶)에게 제향(祭享)한다.’ 하였으니, 오는 3월 초 2일이 곧 길사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전교(傳敎)를 받기를, ‘오는 3월 친잠(親蠶)하는 길일(吉日)을 뽕잎이 생장(生長)하는 때를 헤아려서 간택(揀擇)하여 아뢰라.’고 하셨으므로, 신 등이 통전(通典)을 참고하여 상고해 보았더니, ‘황후(皇后)가 계춘(季春)의 길사(吉巳)에 선잠(先蠶)에 제향하고 친상(親桑)한다.’ 하였고, 《송사(宋史)》에는, ‘계춘의 달에 태사(太史)가 길일을 택하여 황후가 친잠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본단(本壇)에서 선잠에게 제향한다.’고 하였으니, 선잠에게 제향하고 친상하는 것을 일시(一時)에 아울러 행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기후[風氣]는 중국과 아주 달라서, 매년 선잠에 제향할 때에는 뽕잎이 아직 패지 않는데, 올해에는 절후(節候)가 더욱 늦어서 3월 초2일에는 뽕잎이 반드시 패지 않을 것이니, 청컨대 선잠에 제향하고 친잠하는 것을 다시 3월 안의 사일(巳日)로 택하여서 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대로 따랐다.

성종은 양잠을 중요한 산업으로 생각하여 제향하는 일도 솔선하였다. 성종 8(1477)년 3월 14일 신사(辛巳) 4번 째 기사에는 양전(兩殿)에서 삼대비(三大妃)에게 진연(進宴)하였다. 종재(宗宰) 1품 이상과 의정부(議政府) 육조 당상(六曹堂上)과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와 입직(入直)했던 모든 장수와, 선잠제(先蠶祭)의 집사(執事)와 예조 낭청(禮曹郞廳)과 축단 낭청(築壇郞廳)에게 명하여 대궐 뜰에 모이게 해서 주악(酒樂)을 내려 주었다.

성종 12(1481)년 1월 18일 계사(癸巳) 5번 째 기사에는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친잠할 때에 꼭 행하여야 할 사건을 고제(古制)를 살펴서 기록하여 아룁니다.《예기(禮記)》제의(祭儀)에는, ‘대흔(大昕)의 아침에 임금이 삼궁(三宮)의 부인과 세부(世婦)의 길(吉)한 자를 골라 잠실(蠶室)에 들어가게 한다.’ 하였고, 주(註)에, ‘대흔의 아침은 계춘(季春)의 초하루 아침이다.’ 하였으며, 《두씨통전(杜氏通典)》에는, ‘황후가 계춘의 길사(吉巳)에 선잠(先蠶)에 제사한다.’ 하였는데, 우리나라의 절후(節候)가 중국과 달라서 3월 초7일이 바로 길사(吉巳)입니다. 그런데 뽕잎이 아직 다 피지 않았고 또 누에도 깨이지 않았으니, 그 때에 가서 절후를 살펴 중순(中旬)의 길사를 고쳐서 선택하게 하소서.

또《예기》의 제통(祭統)에, ‘제후(諸侯)의 부인(夫人)은 북교(北郊)에서 누에를 쳐서 면복(冕服)을 제공한다.’ 하였고, 한(漢)나라 제도에는 봄에 뽕이 피면 황후(皇后)가 후원(後苑)의 잠실에서 친히 누에를 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선잠단(先蠶壇)은 도성(都城)의 북쪽에 있으므로 지세(地勢)가 좁아서 친잠(親蠶)하기가 어렵습니다. 청컨대 한(漢)나라의 제도에 의거하여 후원에다 채상단(採桑壇)을 축조하여 친잠하게 하소서.

《예기제의(禮記祭儀)에는, ‘옛날에 천자(天子)와 제후(諸侯)가 반드시 공상 잠실(公桑蠶室)을 두었는데, 내[川]와 가까운 곳에 만들었으며, 궁을 쌓는 데에 높이는 한 길(吉) 3척이 되게 하며 가시로 담장을 덮어 외부와 차단하게 한다.’ 하였습니다.

송(宋)나라 제도에는 선잠단(先蠶壇) 곁에 잠실을 짓고 지세를 살펴서 궁(宮)을 만들며, 사면(四面)의 담을 만들되 높이는 한 길 3척이 되게 하며, 위에는 가시를 덮고 중간에 27간의 잠실을 만들되 따로 한 곳에다 전(殿)을 지어 친잠하는 장소를 만든다.’ 하였습니다.

청컨대 이 제도에 의거하여 해당 관사(官司)로 하여금 잠실을 축량하여 짓게 하되, 친잠하는 장소는 따로 전(殿)을 짓지 말고 악전(幄殿)을 설치하게 하소서.

《통전(通典)에는, ‘황후(皇后)가 선잠(先蠶)에 제사하기를 마치고 채상단(採桑壇)으로 나아간다.’ 하였고, 《송사(宋史)》에는, ‘황후가 친잠을 할 적에 유사(有司)로 하여금 본단(本壇)에서 선잠에 제사하게 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선잠단은 북교(北郊)에 있고, 채상단은 후원에 있으니, 선잠에 친히 제사지내기가 어렵습니다. 청컨대 송(宋)나라 제도에 의거하여 관리를 보내어서 선잠에 제사하게 함이 타당합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성종실록 인용 및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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