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임금과 양잠2

경북대학교 윤재수 명예교수
성종 1(1470)년 2월 24일 계유(癸酉) 5번째 기사에는 호조(戶曹)에서 진언(陳言)한 가운데에 행할 만한 조건(條件)을 아뢰기를, “고을마다 양잠(養蠶)하는 것이 폐단이 있으니, 청컨대 뽕나무가 잘 자라는 곳에 도회(都會)를 베풀어 기르게 하소서”하고 권유하였고, 같은 해 12월 25일 무진(戊辰) 4번째 기사에는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잠실의 운영에 대하여 유시하시었다.

충청도(忠淸道)·경상도(慶尙道)·전라도(全羅道)·강원도(江原道)·평안도(平安道)·황해도(黃海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세종조(世宗朝)에 있어서는 모든 도(道)에 다만 잠실(蠶室) 하나씩만 설치하여 가까운 고을에 살고 있는 제사(諸司)의 노비(奴婢)로써 조역(助役)하게 하였는데, 세조(世祖)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만일 매 고을마다 모두 설치하면 사람사람이 저마다 편하고 누에치는 이익이 흥성하여서 노비들이 내왕하는 폐단도 가히 제거될 수 있을 것이다.’ 하셨으나, 지금은 모든 고을 수령(守令)들이 법을 세운 본뜻을 몸 받지 못하고 이졸(吏卒)들로 하여금 사사로운 뽕을 모두 취하게 하여, 백성들이 사영(私營)으로 양잠(養蠶)을 할 수 없게 하고, 또 이졸들이 지나는 곳에서 공억(供億)이 조금만 늦으면 뽕나무를 다 베어버리고, 심한 자는 죄고(罪辜)를 꾸며 만들어서 관(官)에 고소하여 매를 때리며, 만약 누에 농사가 잘되지 못하면 또 집마다 뽑아내고 호(戶)마다 추렴하여 실을 사서 상납(上納)하게 하므로, 이로 인하여 실과 고치가 정(精)하지 못하여 한갓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온 도(道)가 폐해를 받게 된다.

이제는 세종조(世宗朝)의 예(例)에 따라서 매 도(道)에 다만 한 군데의 도회(都會)를 두어 이로써 시험해 보는 것이 옳겠으니, 경(卿)은 이 뜻을 모두 알아서 뽕나무 심기에 마땅한 곳에 도회를 두고, 예전의 실례를 참고하여 부근 여러 고을 사람으로써 잠모(蠶母) 및 조역(助役)할 사람을 약정(約定)해서 윤차(輪次)로 역사(役事)를 고르게 하도록 하라.

또 누에의 좋고 나쁜 것도 또한 종자(種子)에 있는 것이니, 경이 가히 편의하도록 좋은 종자를 예축(預畜)해 두었다가 때를 맞춰서 잘 기르도록 하고, 산출(産出)된 실과 고치로써 친히 감독하여 곧바로 올리도록 하라. 장차 그 올린 수량을 상고하여 이로써 상벌(賞罰)을 행하겠다.”하였다.

성종 2(1471)년 11월 29일 정묘(丁卯) 4번째 기사에는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 오백창(吳伯昌)에게 하서(下書)하기를, “본도(本道)는 금년에 실농(失農)하여 민생(民生)이 어렵고 군색하니, 그 임진년의 도회관(都會官)의 양잠(養蠶)을 정지하라.”는 기록으로 보아 농가의 수확이 부진한 경우에는 공적인 양잠사업을 중단 한 경우도 이었다.

성종 3(1472)년 3월 8일 갑진(甲辰) 1번째 기사에는 “친히 선잠제(先蠶祭)에 쓸 향(香)과 축문(祝文)을 전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성종 4(1473)년 3월 2일에도 선잠제(先蠶祭)에 쓸 향축(香祝)을 친히 전하였다.

양잠소에서는 농민의 노동력 수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성종 5(1474)년 7월 24일 정축(丁丑) 4번째 기사에 행 부사용(行副司勇) 유양춘(柳陽春)이 상서하여 시폐(時弊)를 조목으로 아뢰기를, “농상(農桑)을 힘써야 합니다. 예나 이제나 치도(治道)를 말하는 자는 모두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를 말하고 주(周)나라를 융성하게 여기며 삼대 이후로는 오직 한문제(漢文帝)를 일컫습니다. 그때의 기사(紀事)에서는 오직 농상 밖에 알려진 것이 없고, 그때의 정사(政事)에서는 농사 밖에 알려진 것이 없는데, 반드시 이르기를, ‘전조(田租)의 반을 줄였다’느니 ‘농사의 어려움을 미리 알았다’느니 하였습니다.

그때에는 임금의 부(富)가 민간에 저장되었음으로 홍수나 가뭄이 있더라도 재변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을 갈음하여 직(職)을 받으셨으므로 백성을 돌보는 일을 정사로 삼아 늘 농상에 주의하십니다.

그러나 인력(人力)이 넉넉하지 못하고 지리(地利)가 극진하지 못하여 전지(田地)가 많이 황폐한데도 국세(國稅)는 아직 있고, 공역(公役)은 없어지지 않아서 기한(飢寒)은 앞에 닥치고 매질은 뒤에서 몰아댑니다.

이러한데도 한 번 하서(下書)하여 백성의 조세를 덜어 주시는 것을 보지 못하니, 신은 성조(聖朝)를 위하여 아깝게 여깁니다. 옛 농상(農桑)의 정사는 첫째 그 시기를 빼앗지 말고, 둘째 그 힘을 침해하지 말고, 세째 그 일을 손상하지 말라 하였으니, 참으로 지아비는 밭을 갈고 아낙은 누에를 쳐서 한때에 힘을 아울러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그 시기를 놓친다면 식량을 잃게 될 것입니다.

신이 보건대 잠실도회(蠶室都會)의 고을에서 여러 고을의 백성을 많이 모아, 남자는 적상군(摘桑軍)이라 하고 여자는 양잠부(養蠶婦)라 하여 부려서, 남자는 농사를 짓지 못하고 여자는 누에를 치지 못하게 하면서, 그 시기를 빼앗지 말고 그 힘을 침해하지 말고 그 일을 손상하지 말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가난한 촌락의 백성이 어찌 굶주림에 울고 추위를 외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덕음(德音)을 발하여 폐지하도록 영을 내리시면, 백성의 그 은혜를 받아 전야(田野)가 서로 경축할 것입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성종실록 인용 및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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