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시대 양잠1

경북대학교 윤재수 명예교수
세조는 1417년에 탄생하셨고 1468년에 붕어하셨습니다. 이 생애 중 1455년부터 1468년까지 왕위에 계셨습니다. 문치에 주력하시어 정관정요주해(貞觀政要註解), 공신계감(功臣戒監), 문종실록(文宗實錄), 본국지도(本國地圖) 등을 편찬하게 하고, 변방의 경비를 강화하여 국토를 수비하는 무산진(茂山鎭)을 설치했고, 각도의 군정(軍丁), 한량(閑良)들을 성적(成籍)시켜 국세를 법제화 했다.

1457년 국조보감(國朝寶鑑)을 찬술하게하고, 각읍(各邑)의 군사를 5위(衛)에 분속시키는 군제를 확정하고, 각 역로(各驛路)를 개정하여 찰방(察訪)을 시설하였고, 예문관의 장서를 간행하게 하였으며, 각도에 거진(巨鎭)을 설치했다.

호패법을 실시하고, 곡물 가격이 올라가는 봄과 여름에는 높은 가격으로 농민들에게서 베(布)를 사들였다가 곡물의 가격이 내려가는 가을과 겨울에는 싼 가격으로 미곡으로 바꾸어 주는 상평창(常平倉)을 실시하여 물가를 조절함으로서 서민들의 경제 질서를 바로 잡도록 하였다.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 동국통감(東國通鑑), 기정도보속편(寄正圖譜續編) 등을 신간(新刊) 했습니다. 1459년에는 예문 직제학(藝文直提學) 서강(徐岡), 사헌 감찰(司憲監察) 이근(李覲)에게 명하여, 잠서주해(蠶書註解)를 편찬하게 하였다.

동년 8월 20일에는 임금이 서찰(書札)을 승정원(承政院)에 내리기를, “내가 잠서(蠶書)를 줄여서 만들어 보는 사람을 편리하게 하고, 쉽사리 거행(擧行)시키려고, 친히 수일(數日) 동안을 펼쳐 보았는데, 비록 줄일 만한 말이 있지마는 또한 너무 줄일 수는 없었다. 또 이 한 권의 책이 너무 양이 많지만 연구하기에 어려운 것은 아니고, 다만 그 속에 글귀가 틀리고 주석(註釋)이 잘못된 것만 모름지기 교정(校正)하여 간행(刊行)해야만 한다.

이같이 한다면 전부를 보려고 하는 사람은 전부를 보고, 줄여서 보려고 하는 사람은 줄여서 볼 수가 있다. 우리나라의 인재(人才)로써 옛 글을 경솔히 고친다면 반드시 많은 착오(錯誤)를 초래(招來)할 것이니, 도리어 옛 것을 그대로 두는 것만 못하다.”하고, 마침내 행 대호군(行大護軍) 양성지(梁誠之)에게 명하여 책의 오자(誤字)를 교정(校正)하도록 하였다.

왕명을 받은 양성지는 1459년 10월 1일에는 새로 잠서(蠶書)를 찬술(撰述)하여 바쳤다. 1461년 3월 14일에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최항(崔恒), 우승지(右承旨) 한계희(韓繼禧) 등 문신(文臣) 30여 인에게 명하여, 한글을 사용하여 잠서(蠶書)를 번역하게 하여 일반 농부들도 쉽게 읽고 활용할 수 있게 하였다.

1456년 3월 11일, 1457년 3월 5일, 1458년 3월 8일에는 친히  선잠단에서 양잠(養蠶)을 처음으로 시작하여 세인들이 잠신(蠶神)으로 받드는 신(神)인 누조(累祖) 서릉씨(西陵氏)에게 음력 4월 첫 사일(巳日)에 행하는 선잠제(先蠶祭)에 쓸 향과 축문을 전(傳)하셨다. 고 기록하고 있다.

1459년 5월 7일에는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 황효원(黃孝源)에게 유시(諭示)하기를, “세자(世子)가 나이 어리니 제도(諸道)에서 마땅히 물품을 올리지 말아야 할 것인데, 경(卿)이 붓과 먹을 여러 번 올렸으니, 이것이 비록 학습(學習)하는 도구(道具)이지만 사치한 마음이 발생할까 염려되어 주지 아니하였다. 이제 경(卿)이 또 중궁(中宮)에게 은(銀)으로 장식한 작은 도자(刀子) 등의 물품을 올렸는데, 재물을 허비하여 물건을 제조하면서 정제(精製)하지 못하다면 물건을 함부로 쓰고도 아까운 줄 모르게 될 것이니, 경(卿)의 충성은 내가 실로 가상히 여기지마는 그러나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라.”하였다.

또 유시(諭示)하기를, “듣건대, 경(卿)이 선정(善政)을 베풀어 백성의 환심(歡心)을 얻었다고 하고, 또 듣건대 씨앗 뿌리는 일을 이미 마쳤고, 모[苗]를 심는 것도 이미 고루 되었다 하니 멀리서 위로한다. 본도(本道)는 변방(邊方)이 아니므로 적(敵)을 방어하는 일은 조금 수월할 것이니, 경(卿)이 양잠(養蠶)과 축산(畜産) 등의 일에 마음을 둔다면 나는 반드시 성효(成效)를 볼 것으로 기대한다.”하였다. 이와 같이 세조는 물건을 아껴 사용하게 하고 절약정신을 기르게 하였다.

세조는 즉위 초부터 농본주의(農本主義)에 입각하여 여러 시책을 실행하였다. 특히 궁중(宮中)에 잠실(蠶室)을 지어 왕비(王妃)와 세자빈(世子嬪)을 비롯하여 궁녀들을 시켜 뽕을 따고 누에를 치는 양잠을 시행하게 하였다.

또한 전국의 홀아비, 과부, 고아, 자식이 없는 늙은이들에게는 요역(徭役)을 감하여 주고, 먹을 양식을 나누어 주는 등 백성들을 보살피고, 농사일에 편의를 보아 주었고, 둔전(屯田)의 증설, 및 양전(量田)을 실시하였으며, 백성들의 질병관리를 위하여 양생법을 초록하여 의생(醫生)들이 익혀서 농민들을 돌보게 하는 등 농업생산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중농정책을 펼치셨다. (국사편찬위원회, 세조실록 인용 및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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