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뇌전증학회 홍승봉 회장


WHO가 오는 2020년 우울증이 질병 부담 2위 질환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의 우울증 유병율은 당뇨병을 넘어서 고혈압 다음의 2위 질환으로 보고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의 4대 신경계 질환인 뇌졸중, 치매, 뇌전증, 파킨슨병 환자들의 우울증 치료율은 20~30%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승봉 대한뇌전증학회 회장은 SSRI(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 항우울제 처방 제한을 풀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노력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우울증 치료가 안되는 주 원인으로 'SSRI 항우울제 60일 처방제한 급여기준' 을 꼽고 있다.

사실 이 문제는 우울증 환자의 치료 접근성과 치료기회 확대를 위해 타과 의사들도 처방할 수 있도록 완화해야 된다는 대한뇌전증학회, 대한치매학회, 대한뇌졸중학회, 대한파킨슨병-이상운동학회 등 4개 학회의 의견과 전문영역을 침해하는 것이라는 신경정신의학회 의견이 지속적으로 충돌해 온 민감한 사안이다.

그러나 홍승봉 회장은 다른 무엇보다 환자를 위해서 처방제한을 철폐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는 "2002년 보건복지부 고시에 SSRI 항우울제 처방제한이 마련된 후 우울증 환자의 치료 접근성이 20분의 1 미만으로 떨어져 적절한 치료 기회가 박탈됐다"며 "매일 43명이 자살로 사망하고 있는데 자살 환자들의 80% 이상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밝혔다.

이 급여기준으로 인해 전체 의사의 96%나 되는 신경과, 내과, 가정의학과 등 비정신과 전문의들이 SSRI 항우울제 처방권을 박탈당해 우울증을 진단해도 치료할 수 없게 됐다는 지적이다.

홍 회장은 "보건복지부는 고가의 약을 적게 쓰는 것만 신경썼지, 환자에게 어떤 피해가 올 지 생각을 안했다"면서 "신경과 등 관련과에 의견조회없이 고시한 것이 원죄"라고 주장했다.

부작용이 많은 삼환계 항우울제는 투여기간에 제한이 없는데 반해, 부작용이 훨씬 적고 안전한 SSRI 항우울제에 대해 비정신과의사들이 60일 이상 처방할 수 없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홍 회장은 "급여제한 기준 마련 후 14년간 수만명이 심한 우울증으로 진행됐고 매일 43명, 1년에 1만 5000명이 사망하고 있다"며 "SSRI 항우울제 가격이 1500원에서 400원으로 떨어지면서 처방제한 급여기준의 근거가 없어졌다"고 강조했다.

2014년 기준 우리나라 일반의를 포함한 총 의사 수는 약 10만명으로, 정신과 전문의는 전체 의사 중 약 3%에 불과하다. 이들이 1차 우울증 환자들만 보기에도 벅차다는 지적이다.

홍 회장은 "97%의 비정신과 의사 환자들의 20~40%가 우울증 환자인데 어떻게 정신과에서 모두 진료할 수 있는가"라며 "타질환의 우울증 중 난치성 우울증 환자들만 정신과로 보내도 정신과 외래는 환자로 마비될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비정신과 의사들에게 타질환에 동반되는 우울증을 진료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정신과에도 도움이 돼 윈-윈(WIN-WIN) 할 수 있다는 것.

홍 회장에 따르면 4대 신경계 질환에서 우울증이 문제가 되는 것은 뇌전증 22%, 알츠하이머형 치매 15~55%, 파킨승병 40~60%, 뇌졸중 40~60% 등으로 일반인 우울증 3%에 비해 우울증 빈도가 높기 때문이다.

더욱이 거동이 불편한 뇌질환 환자가 병원을 추가로 방문해야 하기 때문에 환자의 시간·비용과 보호자의 부담이 증가해 많은 중증 환자들이 치료를 포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일반적인 우울증 환자의 정신과 의뢰 기준인 ▲2가지 이상의 SSRI, SNRI 항우울제를 투여해도 효과가 없는 경우 ▲양극성 장애(bipolar disorder)가 의심될 때 ▲정신병 증상(psychotic feature)이 발생할 때 ▲자살 사고가 있을 때 등의 경우가 아니라면 신경계 질환에 동반되는 우울증은 신경과에서 SSRI 항우울제를 투여받을 수 있게 해야 된다는 것이다.

우울증은 6개월에서 1년 사이에 중단 시 재발율이 50%이지만 1년 이상 투여 후 중단할 경우 재발율이 10%로 떨어진다.

홍 회장은 "우울증은 기본적으로 6개월~1년 이상 항우울제를 투여해야 재발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는데 현행 급여기준으로 비정신과 의사들은 SSRI 항우울제 처방 60일 후에는 약을 중단하거나 증상이 좋아져도 약을 더 받기 위해서는 억지로 정신과로 보내야 한다"며 "우울증 빈도가 높은 4대 신경계 질환에 동반되는 우울증의 치료는 암환자와 같이 처방제한을 철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경계 질환의 적절한 우울증 치료는 기존 신경계질환이 빨리 회복되면서 환자의 삶이 개선되고 의료비용 및 사회경제적 비용이 크게 절감된다는 분석이다.

그렇다면 외국의 경우는 어떨까. 지난 2011년 미국, 호주, 뉴질랜드, 일본, 대만, 홍콩 등 세계 20개국 조사결과, SSRI 항우울제의 60일 처방제한은 한 곳도 없었다.

Emilio Perucca 세계뇌전증연맹(ILAE) 회장은 "60일 후에 정신과로 억지로 보내는 것은 환자, 보호자 및 건강보험 모두에 불필요한 부담을 주는 것"이라며 "신경계 질환 환자들에게 SSRI 처방을 제한하는 부당한 규정을 폐지할 것"을 요청하는 의견을 보내오기도 했다.

홍승봉 회장 뿐만 아니라 SSRI 항우울제 처방제한 철폐를 위한 노력은 2009년부터 계속돼왔다.

대한의사협회에서 SSRI 항우울제 급여기준 개선 논의를 위한 여러 진료과의 간담회를 개최하고 보건복지부에 규정 폐지를 건의했으나 무산됐다.

2010년에는 국회 정책간담회 개최했고, 복지부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방문해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심평원 자문회의에서 정신과와 신경과 전문의 각각 3인씩 참여해 토의했으나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등 지속적인 노력에도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홍 회장은 "우리나라는 우울증 치료율 최저국, 자살율 1위 나라라는 오명을 갖고 있다"면서 "이제는 국회와 복지부, 심평원, 신경과, 정신건강의학과 등이 서로 의견 조율해 환자가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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