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과 양잠2

경북대학교 윤재수 명예교수
세종임금은 양잠을 장려하고 소득을 향상시킨 사람을 관료로 임명하여 관직을 주었다. 세종실록 20권, 세종 5(1423)년 5월 13일 임진 2번째 기사에는 “전라도 태인(泰仁)의 양잠감고(養蠶監考) 이효순(李孝順)을 본도(本道)의 역승(驛丞)으로 임명하게 하였으니, 이 사람이 올린 사견(絲繭)이 다른 곳 보다 배나 되어, 이 까닭으로 상을 준 것이다.”라는 기사에서는 세종의 인덕이 잘 표현되고 있다.

또 세종실록 32권, 세종 8(1426)년 4월 16일 기묘(己卯) 2번째 기사에 충청도 감사 유계문(柳季聞)과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 김자양(金自養)이 배사(拜賜)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유계문(柳季聞)에게 이르기를 “한재(旱災)를 근심하여 두려워하는 것은 경(卿)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니, 나의 이런 심회를 본받아 그대의 직책을 조심하여 처리하라.

근래에 가물고 비가 오지 않아 기근이 거듭 이르게 된 까닭으로 궁핍한 사람을 진휼(賑恤)하라 함은 이미 공문으로 보냈지만, 그러나 내년의 일은 알 수가 없으니 창고를 열어 진제(賑濟)하는 것을 너무 급하게 하지 말고 마땅히 헤아려 시행할 것이며, 또 농업과 양잠을 권장하여 백성의 생계를 넉넉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계문(季聞)이 이내 국농소(國農所)에 폐단이 있는 까닭을 아뢰니, 임금이 옳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변진(邊鎭)에서 군인을 모아 농사를 짓는 일은 옳지마는, 별도로 국둔전(國屯田)을 만들어 농민을 시켜 농사를 짓는 것은 옳지 않으니, 경도 폐단이 있는 것을 알 것이다. 성인이 말하기를, ‘백성이 넉넉하면 임금은 누구와 더불어 넉넉하지 않겠는가.’라 하였는데, 나도 국둔전(國屯田)의 옳지 못한 점을 알고 있으나, 다만 태종 때부터 행하여 온 것이므로 감히 경솔하게 고치지 못할 뿐이다. 경도 다시 살피어 그 폐단을 상세히 진술하라”하였다.

그리고 자양(自養)에게 이르기를 “그대에게 명령하는 말도 이에 벗어나지 않으니, 마땅히 백성을 사랑할 것으로써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감히 사랑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세종 임금은 백성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한 성군(聖君)이셨다. 또 세종실록 33권, 세종 8(1426)년 7월 3일 갑오(甲午) 4번째 기사에서는  직산 현감(稷山縣監) 이운(李韻)과 용진 현령(龍津縣令) 우흥범(禹興範)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말하기를 “근래 수재와 한재로 인하여 백성들이 의뢰하고 살 수 없으므로 그대들을 선발하여 보내노니, 나의 뜻을 본받아 그 시기를 빼앗지 말고 농사와 양잠(養蠶)을 권장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의식을 족하게 하고 기한(飢寒)을 면하게 하라.”하였다.

세종실록 35권, 세종 9(1427)년 1월 2일 신묘(辛卯) 1번 째 기사에는 지서산군사(知瑞山郡事) 박눌생(朴訥生)이 사조(辭朝)하니, 임금이 불러 보고 말하기를 “농업과 양잠(養蠶)을 권장하고 백성들을 무육(撫育)하는 것이 임무이다. 하물며 근년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기근(飢饉)을 당하였으니, 그대는 생각하여 하라.”하였다.

세종실록 36권, 세종 9(1427)년 5월 27일 갑인(甲寅) 2번째 기사에는 전라도 감사가 계하기를, “도내 태인(泰仁)의 잠실 감고(蠶室監考)인 전 부사정(副司正) 박정(朴淨)은 양잠에 부지런하고 성실하여 고치 생산이 1백 20여 섬에 달하였으니, 벼슬에 채용하여 뒷사람에게 권장해야겠습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38권, 세종 9(1437)년 11월 9일 계사 2번째 기사에는 유후사(留後司)에 전지하기를, “각도의 양잠(養蠶)은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서 예전 수(數)대로 회복하고 금년의 잠종은 7장을 넘지 않도록 칠 것이며, 그 폐단을 없애는 조건을 마련해서 아뢰라.”하였다.

세종실록 43권, 세종 11(1429)년 3월 10일 병진(丙辰) 2번째 기사에는 충청도 감사가 잠실(蠶室)에서 양잠(養蠶)으로 말미암은 폐단을 갖추어 아뢰니, 임금이 지신사 정흠지(鄭欽之)에게 일러 말하기를 “공상(公桑)과 잠실은 그 유래가 오래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누에를 치는 일이란 백성들에게 끼치는 폐해가 실로 많았기 때문에, 전번에 얼마간 그 폐단을 덜게 하였던 것이니, 이를 호조에 내려 다시 그 폐단을 조목조목 들어서 아뢰게 하라.”하니, 정흠지가 대답해 아뢰기를 “양잠에 사역을 하는 자는 모두 혁파한 사사(寺社)의 노비들이온데, 지난번에 그들로 하여금 반공(半貢)을 바치도록 하였사 온바, 이제 다시 전량을 면제하는 것이 어떠 하오리까.”하니, 그대로 따랐다.

조선 네 번째 왕 세종의 백성사랑과 학문 존숭 정신은 문화를 활짝 꽃피게 하였으며, 어느 시대  보다 농사의 기반을 튼튼히 다진 시기였다. 농업서적을 편찬하고 농사법을 개량하여 농사짓는 백성들의 생계를 정치의 근본으로 삼고 실천하신 임금이셨다.(국사편찬위원회, 세종실록 인용 및 참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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