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과 양잠2

경북대학교 윤재수 명예교수
태종은 백성들에게 양잠을 장려할 목적으로 중앙정부에서 시범을 보이기 위하여 각처에 누에 사육장인 잠실을 두어 누에치는 모범을 보여 백성들이 따라서 누에를 사육하도록 하였다.

태종실록 33권, 태종 17(1417) 년 윤 5월 17일 임신 1번째 기사에서는 경상도 채방 판관(慶尙道採訪判官) 배소(裵素), 풍해도 채방 부사(豐海道採訪副使) 서계릉(徐係稜) 등이 와서 생사(眞絲)와 누에고치를 바치니, 명하였다.

“내가 듣건대, 외방의 양잠(養蠶)에 폐(弊)가 있다 한다. 그러나 각처에 잠실(蠶室)을 둔 것은 나라에서 이(利)를 취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민으로 하여금 보고 들어서 본받고 양잠하게 하려는 것이다.

만약에 집집마다 모두 양잠하는 법을 안다면 앞으로 이를 그만두려 한다. 금후로는 다만 그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양잠을 감독하게 하고, 채방(採訪)은 보내지 말게 하라.” 왕명을 내렸다.

태종실록 34권, 태종 17(1417) 년 10월 19일 신축 4번째 기사에서는 호조(戶曹)에서 채방사(採訪使)를 보내지 말도록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계문(啓聞)은 이러하였다.

“지금 양잠(養蠶) 하는 법이 이미 성하여졌으니, 금년에 잠실(蠶室)을 수리하는 것은 채방사를 보내지 말고 관청의 사무 공사하는 인원(人員)을 택하여 양잠하게 하고, 소재지의 수령이 때 없이 점검하여 게으름을 부리는 자는 논죄하게 하소서.”라고 소청하였다.

태종실록 36권, 태종 18(1418) 년 7월 2일 경술(庚戌) 8번째 기사에서는  교서관 교리(校書館校理) 김상직(金尙直) 등이 진언하기를, “잠상(蠶桑)은 왕정(王政)의 큰일이기 때문에 국가에서 공상 잠실(公桑蠶室)을 설치하여 백성들에게 양잠(養蠶)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은 지당합니다.”

공상 잠실(公桑蠶室)이란 백성들에게 누에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하여 나라에서 설치하여 운영하던 뽕밭과 잠실(蠶室)을 말한다.

“그러나, 공상(公桑)이 성하지 못하면 민호(民戶)의 뽕을 따므로 원망과 탄식을 가져오는 수가 간혹 있습니다. 원컨대, 한광(閑曠)한 땅을 헤아려 공상(公桑)을 더 심어서 장성(長盛) 하기를 기다린 연후에 양잠(養蠶)을 하도록 허락하여 백성들의 소망을 위로하소서.”라고 하니, 영돈녕 유정현(柳廷顯)·우의정 이원(李原) 등이 의논하기를, “공상(公桑)이 장성하는 기간에는 각기 잠실이 있는 곳의 산 뽕나무[山桑]와 공지(空地)의 뽕나무의 다소를 적당히 헤아려서 양잠하게 하고, 각호(各戶)의 뽕잎은 빼앗지 말게 하고, 어기는 자는 엄격히 다스리소서.”하니, 명하여 의논한 범위 안에서 행문이첩(行文移牒) 하게 하였다.

태종은 백성들의 생활을 언제나 걱정한 임금이었지만, 왕자 시절 정몽주를 제거하여 신진세력의 기반을 확고히 하고 태조의 건국에 일익을 담당하였으며, 정도전 등을 제거하는 제1왕자의 난을 주도하여 정조의 즉위를 도왔다. 방간이 일으킨 제2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개국초기의 기반을 튼튼하게 하고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강화하고 호패법(號牌法)을 실시하여 인적자원을 확보하였고 삼가금지(三嫁禁止)를 실시하여 유교 도덕을 확립하였다.

1403년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하여 동활자(銅活字) 계미자(癸未字)를 만들고 호포를 폐지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주는 한편 저화(楮貨)를 발행하여 경제유통의 질서를 확립했다. 신문고(申聞鼓)를 설치하여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어 주어 민원을 처리하는 등 백성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태종은 통찰력이 뛰어나고 예리한 인물이었다. 정사를 의논할 때 대신들이 형식적인 답변을 하거나 다른 뜻을 품은 우회적인 발언을 하면 바로 정곡을 찔러 무안을 주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탁월한 것은 정치력과 결단력이었다. 그는 여러 정치세력과 신하들의 입장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활용했다.

문제를 판단하는 데는 명분이나 인연, 과거의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적으로 생각하며 신속하게 결단을 내리는 능력이 있었다. 태조의 배향공신을 책정할 때 그때까지 역적으로 규정되어 있던 정도전과 남은을 선발하게 했으며 자신에게 항거한 죄로 유배시켰던 황희(黃喜)를 세종에게 추천하여 중용하게 했다.

또한 장인 민제의 가문이 외척으로 성장하면서 이들이 양녕대군을 지지하고 그 주위에 수구파가 결집하자 장인과 처남들을 과감하게 제거했다. 1418년 충녕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여 2개월 후 선위했으나 선위 한 후에도 군정과 중요한 정사는 직접 처리하면서 세종의 장인 심온(沈溫)을 병권 남용의 죄를 들어 전격적으로 처형했다.

세종의 치세를 위한 탄탄한 기반을 마련하였다. 세종대의 흥륭도 실은 태종의 업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1422년 5월 30일 유명을 달리하셨다. 시호는 공정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恭定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며, 묘호(廟號)는 태종이다.

나중에 숙종과 고종 때 존호를 더하여 시호를 모두 합치면 태종공정성덕신공건천체극대정계우문무예철성렬광효대왕(太宗恭定聖德神功建天體極大正啓佑文武睿哲成烈光孝大王)이다. 능은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헌릉(獻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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