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전결우(桑田結友)

경북대학교 윤재수 명예교수

이성계는 고려의 우수한 장수였다. 고려 공민왕은(1369년) 12월에 이성계에게 동북면원수(東北面元帥)를 제수하고 북쪽 변방을 방어하게 하였다.

이성계는 1370년 경술 정월, 기병 5천 명과 보병(步兵) 1만 명을 거느리고 동북면(東北面)으로부터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6백여 리(里)를 행진하여 설한령(雪寒嶺)에 이르고, 또 7백여 리를 행진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건넜다.

이날 저녁에 서울의 서북방에 자기(紫氣)가 공중에 가득 차고 그림자가 모두 남쪽으로 뻗쳤는데, 서운관(書雲觀)에서 말하기를, “용감한 장수의 기상입니다.”하니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이성계(李成桂)를 북방에 보냈으니 반드시 그 감응(感應) 일 것이다.”하였다.

이때 동녕부(東寧府) 동지(同知) 이원경(李元景)은 이성계가 온다는 말을 듣고 우라 산성(亐羅山城)으로 옮겨 가서 대로(大路)를 지켜 막고자 하였다.

이성계가 야둔촌(也頓村)에 이르니, 이원경(李原景)이 와서 도전(挑戰) 하다가 조금 후에 갑옷을 버리고 재배(再拜) 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선조(先祖)는 본디 고려 사람이니, 원컨대, 신복(臣僕)이 되겠습니다.”하고, 3백여 호(戶)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그 추장(酋長) 고안위(高安慰)는 오히려 성(城)에 웅거하여 항복하지 않으므로, 우리 군사들이 그를 포위하였다. 이때 이성계는 활과 살을 가지지 않았으므로 수종(隨從) 하는 사람의 활을 가져와서 편전(片箭)을 사용하여 이들에게 쏘았다.

무릇 70여 번이나 쏘았는데 모두 그 얼굴에 바로 맞으니, 성중(城中) 사람들이 겁이 나서 기운이 쑥 빠졌다. 안위(安慰)는 능히 지탱하지 못하여 처자(妻子)를 버리고 줄에 매달려 성을 내려와서 밤에 도망하였다.

이튿날 두목(頭目) 20여 명이 백성을 거느리고 나와서 항복하여, 여러 산성(山城)들은 소문만 듣고 모두 항복하니, 호(戶)를 얻은 것이 무릇 만여호(萬餘戶)나 되었다. 전쟁에서 얻은 소 천여 마리와 말 수백여 필을 모두 그 주인에게 돌려주니, 북방 사람이 크게 기뻐하여 귀순(歸順)한 사람이 저자[市]와 같았다.

이에 동쪽으로는 황성(皇城)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동녕부(東寧府)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압록강에 이르기까지 텅 비게 되었다. 황성(皇城)은 옛날 여진(女眞) 황제(皇帝)의 성(城)이다.

우왕 8년(1382) 7월, 여진족 호발도(胡拔都)가 동북면에 난입하여 주민을 약탈하고 사로잡아갔다. 왕은 대대로 그 지방에 살면서 군사 업무를 맡아 지역 사정에 밝은 이성계를 동북면 도지휘사에 임명하고 임지에 파견하였다.

이성계는 임지에 도착하여 주민들을 위로하고 적병을 몰아내고 돌아왔다. 이듬해 8월에 호발도가 다시 와서 단주(端州, 단천)를 노략질했다. 부만호(副萬戶)의 자리에 있는  김동불화(金同不花)가 적군과 내응해 재물을 모두 챙겨 일부러 뒤에 빠져 있다가 거짓으로 잡혔다.

상만호 육여(陸麗)와 청주(靑州, 북청) 상만호 황희석(黃希碩) 등이 여러 번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왕명을 받은 이성계는 호발도와 싸웠다. 이때 이두란(李豆蘭)이 모친상으로 청주(靑州)에 있었는데, 이성계는 나라 일이 급하니 상복을 입고 있을 수 없다며 상복을 벗고 따르도록 했다.

길주(吉州) 들에서 호발도를 만난 선봉 이두란은 그와 싸우다가 크게 패해 돌아왔다. 곧 이성계가 도착했다. 호발도는 두꺼운 갑옷을 세 겹으로 입고 붉은 털옷을 걸친 채 검은 암말을 타고 진(陣)을 옆으로 펼쳐 기다리고 있었다.

속으로 이성계를 깔보고는 군사를 남겨둔 채 칼을 뽑아 앞으로 달려 나오니, 이성계도 혼자서 칼을 뽑아 말을 달려 나갔다. 칼을 휘둘러 서로 쳤으나, 두 칼이 모두 번쩍이면서 지나쳐 맞히지 못 했다.

땅바닥에 떨어진 호발도가 미처 말을 타기 전에 이성계가 급히 말을 돌리고 활을 당겨 그 등을 쏘았다. 갑옷이 두꺼워 화살이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곧 다시 그의 말을 쏘자 말이 넘어져 호발도가 땅에 떨어졌다.

이성계가 다시 쏘려는데 그 휘하 군사들이 우르르 몰려와 함께 그를 구해냈습니다. 우리 군사도 도착하니, 이성계가 군사를 풀어 크게 적군을 쳐부수었다. 호발도는 겨우 몸만 빠져 도망쳤다.

9월에 이성계는 동북면에서 귀경하는 길에 안변에 이르니, 비둘기 두 마리가 밭 중앙에 있는 뽕나무에 모여 앉아있었다. 이를 본 이성계가 활을 쏘아 단발에 비둘기 두 마리를 맞추니 함께 떨어졌다.

뽕밭 가에서 한충(韓忠) 김인찬(金仁贊) 두 사람이 김을 매고 있다가 이를 보고 감탄해 말했다. “대단합니다, 도령(都領)의 활 솜씨가.” 이성계는 웃으면서 말했다. “도령은 벌써 지났소.” 그러고는 두 사람에게 비둘기를 주며 먹으라고 했다.

그러자 두 사람이 조밥(粟飯)을 차려 바쳤고, 이성계는 그 성의를 보아 조밥을 들었다. 두 사람은 마침내 이성계를 따르게 되었고 이성계의 건국에 많은 도움을 주었고, 두 사람 모두 개국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이성계는 조선 건국 후 양잠을 장려하였다.(태종실록 인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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