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익의 뽕나무

경북대학교 윤재수 명예교수
이조(李朝) 시대에는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습니다. 농업은 사람들의 먹거리와 입을 거리 그리고 삶의 공간을 마련할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양잠을 권장하여 양민을 잘 살도록 행정력을 발휘한 사람은 많다고 생각 되지만 이원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원익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이다. 한성부 출신으로 아버지는 함천성(咸川正) 억재(億載)이며, 어머니는 감찰 정치(鄭錙)의 딸이다.

1547년 (명종 2)에 한성부 유동(楡洞) 달천방(達川坊, 지금의 종로구 동숭동 일대)에서 태어났다. 1569년(선조 2)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이듬해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1573년 성균관 전적이 되었으며, 그 해 2월 성절사(聖節史) 질정관(質正官)으로 권덕여(權德輿)와 함께 북경(北京)에 다녀왔다. 그 뒤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거쳐 이듬 해 가을 황해도 도사에 임명되었다.

1575년 정언(正言)이 되고 그 후 35세(1582년)까지 회계를 맡는 부서인 호조(戶曹), 의례를 맞는 예조(禮曹), 법률을 담당하는 형조(刑曹)의 좌랑(佐郞, 정육품 벼슬)과 예조 정랑(正郞),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홍문관(弘文館) 응교(應敎)등을 거친 이원익은 공적인 일이 아니면 외출도 잘 하지 않는 성품이었지만 뛰어난 능력으로 학문과 현실 모두에서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던 이이(李珥), 유성룡(柳成龍) 등에게 인정받았고 35세에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기구인 동부승지(同副承旨, 정3품)가 되었다.

1583년 도승지 박근원(朴謹元)과 영의정 박순(朴淳)의 사이가 좋지 않아 승정원이 탄핵을 받은 바 있었는데, 다른 승지들은 도승지의 책임일 뿐이라고 물러났지만, 이원익은 동료를 희생시키고 자신만이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일이라는 입장을 견지해 결국 파직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듬 해 부친상을 당한 이원익은 5년간 관직에서 물러나 있다가 1587년 이조참판 권극례(權克禮)의 추천으로 안주목사에 기용되어, 양곡 1만여 석을 청해 기민을 구호하고 종곡(種穀)을 나누어주어 생업을 안정시켰다.

또, 병졸들의 훈련 근무도 연 4차 입번(入番)하던 제도를 6번제로 고쳐 시행하였다. 이는 군병을 넷으로 나누어 1년에 3개월씩 근무하게 하던 것을 1년에 2개월씩으로 고쳐 백성들의 부담을 경감시킨 것이다.

이 6번 입번제도는 그 뒤 순찰사 윤두수(尹斗壽)의 건의로 전국적인 병제로 정해졌다. 그리고 뽕나무를 심어 누에치기를 권장하여 주민들이 윤택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였다. 그가 양잠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주민들로부터 이공상(李公桑) 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이공상이란 이원익의 뽕나무란 뜻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왕의 피난을 선도하고 평양이 함락되자 정주로 가서 군졸을 모집하고, 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어 왜병 토벌에 전공을 세웠다. 1593년 평양 탈환에 공헌하였다.

1595년 우의정에 임명되었다. 그후 변무사(辨誣使)로 명나라를 다녀온 후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1600년 다시 좌의정을 거쳐 도체찰사에 임명되어 전란 후의 질서회복에 전력하였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에 2등에 책녹되고 완평부원군(完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광해군 즉위 후 다시 영의정이 되었을 때는 전쟁 복구와 민생 안정책으로 국민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대동법(大同法)을 경기도지방에 한해 실시해 토지 1결(結)당 16두(斗)의 쌀을 공세(貢稅)로 바치도록 하였다.

광해군이 난폭해지자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대비에 대한 효도, 형제간의 우애, 여색에 대한 근신, 국가 재정의 절검 등을 극언으로 간쟁했고, 임해군(臨海君)의 처형에 극력 반대하고 왕대비 폐위론을 반대하여 홍천으로 유배되었으며 뒤에 여주로 이배되었다.

1623년(인조 1) 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하자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았다.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자, 인목대비에게 간청하여 광해군을 유배하도록 하였다.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때에는 80세에 가까운 노구로 공주까지 왕을 호종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도체찰사로 세자를 호위해 전주로 갔다가 강화도로 와서 왕을 호위했으며, 서울로 환도하자 훈련도감제조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고령으로 체력이 약해져 사직을 청하고 낙향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왕의 부름이 있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성품이 소박하고 단조로워 과장이나 과시할 줄을 모르고, 소임에 충실하고 정의감이 투철하였다. 다섯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나 집은 두어 칸짜리 오막살이 초가였으며, 퇴관 후에는 조석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했다 한다. 인조로부터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저서로는 ‘오리집’·‘속오리집’·‘오리일기’ 등이 있으며, 가사로 ‘고공답주인가 雇貢答主人歌’가 있다. 인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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