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와 천재 - 유달영(1)

경북대학교 윤재수 명예교수
성천 류달영 교수를 생각하면서 그분이 지은 누에와 천재라는 제목의 수필을 소개합니다.

서당에 다니던 내가 긴 머리꼬리를 잘라 버리고 외숙을 따라 충청도에 갔을 때에 생긴 우스운 이야기의 한 토막이다. 나는 거기서 간이한 산수와 일어를 얼마 동안 익혀 가지고 보통학교 1학년에 중도 입학을 하였다. 내 외숙은 일찍 개화한 분이며, 내 외숙모는 외숙의 지시로 신식 법으로 누에를 여러 장 쳐서 적지 않은 수입을 올렸다.

작은 개미 같은 새까만 어린누에들을 누에씨에서 쓸어 낸 것이 며칠 안 되는 성싶은데, 벌써 손가락만큼씩 큰 누에들이 손바닥 같은 뽕잎을 서걱서걱 먹어 내려가고 있는 것이 신기하고도 대견스러웠다.

내가 외숙모 옆에 서서 잠박에 가득 찬 누에들을 보고 있노라면, 깊은 밤에 창 밖에 내리는 봄비 소리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곤 했다. 여러 마리의 누에들이 뽕을 먹는 그윽한 소리는 내 마음을 착 가라앉게 해 주었다. 그리고 옥비녀같이 희고도 탐스러운 누에들은 내 눈앞에서 무럭무럭 몸뚱이들이 자라나고 있는 듯하였다.

“외숙모, 누에는 참 재주도 좋아.” 혼잣소리로 감탄하고 있노라니, 뽕을 주던 외숙모가 빙그레 웃으시면서. “그렇구말구, 재주가 좋구말구.” 이렇게 내 말에 찬동해 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외숙모는 또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예전 노인들이 그러시는데, 누에를 먹기만 하면 사람들도 비상한 재주가 생긴대.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먹을 수가 있어야지.” 나는 ‘비상한 재주’라는 한 마디에 그만 귀가 번쩍 띄었다. 그래서 입 속으로 ‘비상한 재주, 비상한 재주’ 하고 뇌어 보았다. 그리고 ‘정말 그럴지도 몰라. 참말일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외숙모, 얼마나 큰 누에를 몇 마리나 먹으면 된대요?”하고 슬쩍 물어보았더니, 외숙모는 “왜, 너 정말 누에를 먹어 보련?” 하시면서 나를 유심히 내려다봤다. 나는 얼떨결에, “아아뇨, 그걸 징그럽게 어떻게 먹어요?”하고 딴전을 피웠다.

외숙모는 소리를 내어 킬킬 웃으면서 “먹기로 한다면야 제일 큰 것으로 다섯 마리쯤은 먹어야 약이 될걸.” 이렇게 말씀하셨다. ‘제일 큰 것으로 다섯 마리.’ 이것을 나는 똑똑하게 기억해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요한 정보였다. 그리고 몇 번이고 '누에와 비상한 재주'에 대하여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나는 결심을 했다. 잠박 위의 섶을 뒤지면서 누에를 이것저것 집어들었다 되놓았다 하면서 골라 보았다. 그렇게 징글맞게 커 보이던 누에들이 어쩐지 집어 보면 모두 작은 것만 같았다. ‘더 큰 놈은 없을까?’ 하고 한동안뒤적거렸다. 나는 제일 굵고 탐스러운 누에 한 마리를 우선 골라 추켜들었다.
“이런 것 다섯 마리만 먹어 놓는다면, 나는 힘 안 들이고 학기마다 첫째를 하고 우등상을 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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