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사회단체 임원 워크샵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워크샵 행사장에 가는 도중 휴게소를 들리게 되었다. 잠시 화장실 옆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는데, 한 아주머니가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장실이 크기만 했지 여자들 입장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아 용변을 보려고 해도 줄을 서야 하고, 거기다 밝아야 하는 화장실이 어두워서 다치기 십상이라며 이따위로 하니 정부가 욕먹고 공무원들이 욕을 먹는 거 아니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옆에 함께 한 30대의 딸이 “엄마 창피하게 왜 이래요. 그리고 엄마 지금 선글라스 쓰고 화장실이 어둡다고 하면 어떻게 해” 한 창 떠들던 50대 아주머니가 멋쩍어하며 고개를 숙인 채 자리를 빠져나간다.

달아나는 아주머니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며 느끼고 판단하는 기준도 저렇게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으니 당연히 화장실이 밝을 수가 없었지만, 자신의 느낌만을 갖고 남을 탓하고 있는 것이다.

선글라스를 쓰는 이유 중 하나는 눈부신 햇빛을 막아 눈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선글라스 하면 우리가 얼핏 떠오르는 것이 기관원들이 검정 선글라스를 끼고 유명 인사들을 경호하는 모습일 것이다.

선글라스의 특징은 자신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모르게 하고 상대방에 시선을 둘 수 있는 장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때는 선글라스가 정보. 수사 관련자들의 전용물이자 상징물이 되기도 했다.

그런 선글라스가 요즘은 흔해져 특권의식을 느끼지 못 할 정도로 일반화 되었다.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이유로 눈부신 햇빛을 가리는 것도 있겠지만 자신의 시선을 내 보이지 않고 감추려는 의도도 있다.

더 나아가 내 모습의 단점을 되도록 남에게 노출시키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의 작은 티라도 보려는 이중 잣대가 우리의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일까 선글라스가 일반화되면서 선글라스의 모양도, 색깔도 다양해지고, 심지어는 장식용으로 지니고 다닐 정도가 되었다.

역(逆)으로 표현하자면 그만큼 감추고 싶은 것이 많은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승용차의 짙은 선팅이 그렇고 최근에 유행하는 ‘미러(mirror) 선글라스가 그런 한 예 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표면이 반사경처럼 빛나며 바닷가의 느낌이 물신 나는 선글라스. 안경점에 진열된 선글라스를 보면 필자도 한 번 써보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선글라스들이 많다. 모두가 내 눈의 시선은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을 은밀하게 주시할 수 있는 탐나는 선글라스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정보기관원이 아니어도, 휴양지가 아니더라도, 직업과 장소 불문하고, 아무 곳에서나, 누구든지 평상시에도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선글라스를 생각하다 문득 ’겉과 속‘ 이 다른 가면이 떠올랐다.

어느 한 작가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에 따라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고 쓰는 게 있는데 그것이 바로 허세라는 가면이라고 했다. 동감이 간다. 짙은 검은색 선글라스가 어찌 보면 마치 가면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선글라스나 가면이나 한결같이 한 사람의 눈과 얼굴 모습 반을 가려주는 공통점이 있다. 작가의 말처럼 이 세상을 살다 보면 남 앞에서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노출시키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자신을 감추며 과장된 행동을 취할 때도 많다.

정치인이 그렇고 종교인, 학자, 교수, 법조인들이 그런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선글라스와 가면이 벗겨지고 추잡한 것들이 드러나면서 신뢰감을 추락시키며 국민들의 마음을 아프게도 했다.

사회에서 어떤 물의를 일으킨 사람들은 대다수가 짙은 색깔의 선글라스를 쓰고 자신을 위장하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이 선글라스를 벗고, 가면을 벗고 뉘우치는 모습을 보면 동정이 가면서도 인생이 불쌍해 보인다.

비록 한순간 선글라스와 가면은 벗었다고 하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양파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벗겨도 벗겨도 진실의 알맹이가 보이지 않고 결국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글을 쓰는 필자도 역시 어쩔 수 없이 선글라스를 쓰고, 때론 가면을 쓸 수밖에 없다는 현실에 심한 자괴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과연 가면을 쓰지 않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가면을 쓰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

그러나 현실은 안타깝게도 가면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한 마디로 사람이란 실로 불가사의 한 존재다. 이 세상이 창조된 이후 아직까지 똑같이 닮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같은 부모로부터 한 날 한 시에 태어난 쌍둥이라도 닮지는 않았다.

닮지 않은 만큼 생각도 같지 않다. 따라서 보는 시각도 똑같지 않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 다만 나(自我)란 어디까지나 나 일 뿐이지 남이 될 수 없기에 판단이 다를 수도 있다.

문제는 똑같은 사물을 볼 때 자신이 어떤 색깔의 선글라스를 쓰느냐에 따라 시각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느낌만을 주장하게 되면서 상대와 갈등을 빚게 되는 것이다.

똑같은 푸른 하늘이건만 어떤 색깔의 선글라스를 쓰고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선글라스를 벗어보자 그러면 세상을 더 솔직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우리가 될 수 있다.

나의 경험, 나의 환경, 나의 유전에 의해 엮어진 나를 바로 알고, 가꾸어 간다면 이 세상은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인정하는 진짜 삶을 사는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다.

[시인. 칼럼니스트. 열린사이버대학 실용영어학과 특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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