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모험에 도전해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던 유명한 곡예사가 있었다. 그 곡예사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또 다른 모험에 도전했다.

나이아가라폭포 위에 줄을 매달고 그 줄 위를 바퀴가 달린 손수레를 타고 건너가겠다는 것이다. 도전을 하는 날 TV 방송국과 신문기자들의 열띤 취재 열기 속에서 폭포 주변에는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구름떼 같이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잠시 후 채색 옷으로 단장한 곡예사가 손에 바퀴 하나가 달린 손수레를 들고서 줄을 타기 위해 모습을 보였다.

그가 폭포 근처로 다가서자 운집한 많은 사람들이 환성을 지르며 환호했다. 순간 그가 잠시 발을 멈추고 사람들을 향해 “여러분 이제 내가 이 폭포 위로 바퀴가 하나뿐인 수레를 타고 건너갈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내가 지금까지 줄타기에서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번에도 내가 저 폭포를 무사히 건너갈 것이라고 믿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 하고 소리를 쳤다.

그러자 많은 군중들이 와~아 하며 열광적으로 환호를 보내며 어서 빨리 줄을 타고 폭포를 건너가라고 아우성이다. 이어서 곡예사는 “여러분 내가 정말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까?” 하자 모두가 큰 소리로 “네~에”하고 응답하며 빨리 줄을 타라고 성화다.

그러자 이번에는 곡예사가 “정말 여러분들이 날 믿는다면 이 손수레에 나와 함께 타고 이 폭포를 건너가실 분 딱 한 분만 모시겠으니 희망자는 앞으로 나오시기 바랍니다.”라고 말을 했다.

뜻하지 않은 곡예사의 제안에 그 많은 군중들 중에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을뿐더러 갑자기 조용해졌다. 결국 많은 사람들은 곡예사를 믿는 척 했을 뿐 정말 확실하게 믿은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환호하던 많은 군중들 중에는 아무도 손수레를 타고 곡예사가 끄는 데로 밧줄 위를 함께 건너갈 그런 믿음을 지닌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다. 환성을 지르며 열광적으로 박수를 보냈던 많은 군중들은 곡예사를 ‘믿는 척’ 했을 뿐 실상은 믿지를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곡예사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믿는 척’ 과 ‘믿는 것’ 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참된 ‘믿음’은 불가능에 도전하여 이룰 수 없는 꿈을 이루는 꿈꾸는 모험가를 말한다.

성경에도 겨자씨만 한 믿음만 갖고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만큼 믿음을 갖는다는 게 쉽지 않다는 말이다.

마태복음 17장과 마가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에 관련해 언급하며 예수 자신이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리라 하셨지만, 안타깝게도 그 예언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며 따르는 제자들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예수를 정치적인 지도자로 믿는 척 했을 뿐 예수를 온전히 믿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던 많은 제자들이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자 실망하며 모두가 뿔뿔이 흩어져 제 갈 길을 찾아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성경에 두 맹인이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애원을 한다. 두 맹인은 어떻게 해서든 눈을 뜨고 싶다는 일념과 또 그런 이적을 행 할 수 있는 능력자가 예수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가며 끈질기게 애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맹인들에게 예수님은 묻는다.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 믿느냐?” 그때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믿는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들은 예수님은 “너희 믿음대로 되라”라고 하셨다.

그들은 결국 믿음대로 자신의 소원을 풀게 되어 눈을 뜨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확신의 믿음을 갖고 있었기에 그들은 믿음대로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예수의 옷자락만 잡아도 병이 나리라고 믿었던 여인도 그 믿음대로 깨끗함을 얻었다.

말씀만 들어도 병이 나리라고 믿었던 백부장도 그 믿음대로 하인의 병을 낫게 했다. “구하라 그러면 주신다.” 그렇다 구하기 전에, 찾아보기 전에, 두드리기 전에, 포기하거나 체념할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일반적으로 국회의원들이 국민들에게 많은 것을 약속한다. 특히 선거철만 되면 금배지를 달기 위해 후보자들이 수많은 공약을 내세우며 자신을 믿어달라고 한다. 그들의 달콤한 말을 믿고 찍어 주었으면 그들의 공약을 믿고 있어야 하는 데, 국민들은 그 공약을 믿지 못하고, 조급한 마음에서 실망감에 빠져 우울한 마음이 된다. 더러는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 같은 현상은 후보자일 때 그들은 하나같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을 썩지 않게 하고, 세상을 맛있게, 세상을 밝게 만들겠다고 외쳤는데, 정작 금배지를 달고 나면 언제 그런 공약을 했나 할 정도로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소금과 빛이 되겠다고 했으니 믿어야 하는 데 안타깝게도 믿음 이전에 불신의 마음으로 아파한다. 오죽하면 국회의원들의 숨소리조차 믿을 수 없다는 말이 나올까. 국회의원을 믿지 못하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 또 하나의 예화를 들어보겠다.

어느 마을에 40대 두 부부가 담 하나를 놓고 나란히 살고 있었다. 그런데 두 부부가 사는 것을 보면 한 부부는 하루가 멀다 하고 부부싸움을 하고, 다른 부부는 시부모님에 두 아이까지 함께 살지만, 언제나 웃음이 밖에까지 넘쳐났다.

하루는 늘 싸움을 하던 부부가 옆집을 찾아가 그 비결을 묻기로 했다. “이렇게 많은 식구가 사는데 어떻게 작은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웃음소리가 끊기지 않고 밖에까지 들리는 건가요?” 그러자 옆집 남편이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아마도 우리 집에는 잘못한 사람들만 살고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고 놀란 부부가 다시 물었다. “잘못한 사람들만 산다니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담장 넘어 집에 사는 남편은 웃으며 다시 말했다.

“가령 제가 방 한가운데 놓여 있던 물그릇을 실수로 발로 차 엎었을 때, 저는 내가 부주의해서 그랬으니 내가 잘못했다고 합니다. 그럼 제 아내는 빨리 치우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또 저희 어머니는 그걸 옆에서 보지 못한 당신 잘못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모두 자신이 잘못한 사람이라고 말하니 싸움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다 이 부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신의 생각이 바뀌면 다툼이 있을 수 없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다. 좋은 것은 내 덕분, 나쁜 건 네 탓! 이게 바로 언쟁의 시초가 되는 것이다.

요즘 안하무인격으로 막말을 하며 막 나가는 야당의 초선 국회의원들을 비롯한 다수의 국회의원들을 보면 이런 안타까운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잘못한 사람들만 사는 부부처럼 자신이 잘못하는 사람이라는 마음을 갖는 국회의원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일이 있을 땐, 다른 의원 ‘덕분에’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땐, ‘괜히 저 때문에’라는 마음을 갖는다면 의회 정치가 작지만 따뜻한 변화가 시작될 것이다. 그런 의원들이 있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끝으로 막말을 서슴지 않고 하는 의원들에게 한 마디 하고 싶다. 국가 원수는 국민 다수가 뽑은 지도자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대통령을 모독하는 자에게는 지위 고하 장소를 불문하고 엄중하게 처벌하는 법을 제정했으면 한다.

참으로 부끄럽고 민망하다. 믿음을 주는 국회의원들이 단 열 명이라도 있다면 이 나라는 엄청나게 변화되고 밝고 맑은 세상이 될 것이다.

[시인. 칼럼니스트. 열린사이버대학 실용영어학과 특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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