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 사육의 역사

경북대학교 윤재수 명예교수

누에 사육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합니다. 역사가 기록되기 이전부터 사람의 지능이 발달하여 수치심을 알고 몸을 가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잠업 교과서는 오래전부터 있어 왔지만 양잠농가의 누에 사육 환경의 기록은 1619년  태촌(泰村) 고상안(高尙顔)이 지은 농가월령의 기록이 시초입니다. 

태촌 고상안(高尙顔)은 본관이 개성(주)[開城(州)]이고 자(字)는 사물(思勿)이며 상주목 용궁현 왕태리에서 1553년 7월 22일 출생하였다. 1573년에 사마시(司馬試)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576년에 식년시 문과(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하였습니다.

1577년에 일선횡관(一善黌官), 1578년에 성환도찰방(成歡道察訪), 1581년에 함창현감(咸昌縣監), 함창현감으로 재임 시 수정보(水晶洑)를 축조하였고, 1582년 좌랑(佐郞), 1584년 감찰(監察), 1588년 정량에 배임되었고, 1591년 서울에서 귀향하였습니다.

1594년에는 삼가현감(三嘉縣監)에 배임되어 근무 중 권율의 천거로 무과(武科) 별시(別試) 시관(試官)으로 차출되어 통영으로 가게 되어, 같은 해에 급제한 동료 이순신과 보름 동안 같은 병영에서 생활하면서 이순신과 많은 시를 교환하면서 교분을 가지게 되었다.    

1597년(丁酉)에 왜구가 재 침입하자 왜적을 막을 여덟 가지 계책을 진술하여 체찰사 유서애(柳西厓)에게 올렸다. 1601년 지례(知禮) 현감, 1602년 함양(咸陽) 군수, 1606년 울산(蔚山) 판관, 1607년 풍기(豊基) 군수 등의 지방수령(地方首領)을 역임하면서 관리를 독려하여 백성들을 편하게 하였다.

1609(光海 元年)년에 33년간의 벼슬살이를 끓고 전원(田園)에서 우유(優遊)하면서 자호(自號)를 태촌거사(泰村居士)라 하고 산양의 영수(潁水)가에 집을 짓고 소영(嘯咏)하면서 세월을 보내다가 집 남쪽에 넓은 반석이  있어서, 호를 남석노인(南石老人)이라하고 정자를 지어 남석재(南石齋))라 이름 붙이고 친히 가동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

1619년에 그가 남긴 농가월령(農家月令)은 한글로 언역(諺譯) 하여 농민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하였으나 작품은 전하여지지 않는다. 당시 선비의 신분으로서 농사에 밝았고 농부를 가르치기까지 한 그의 행적은 농업을 중시하고 농민을 사랑하는 마음이 높고 깊었다.

농사에 관심을 두고 농부와 교감하고자 한 그의 삶의 태도는 높이 올라 출세를 하기보다는 초야에 들어가 민중적 삶을 공유하고자 하는 가치관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태촌이 농가월령을 저술한 목적은 임진왜란 후 농서가 흩어져 없어져서 탄식한 나머지 “40여 년간의 목민관직(牧民官職)에서 항시(恒時) 상농(尙農)을 권농(勸農) 하면서 얻은 농사 경험과 견문한 바의 실험적 자료를 모은 실용적 농역서(農曆書)로서 여러 농가에 농업기술을 지도하고자 저술하였다. 그는 한문체를 한글로 번역하여 한문을 모르는 농부가 알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하였지만 현존하지 않는다.

양잠에 관한 기록은 3월 절(節) 청명(淸明) 일에 잠종을 따뜻한 곳에 안치한다. 만약 뽕나무의 잎이 피지 않았는데 누에가 깨어 나오면, 지난해 가을에 가루로 만든 뽕잎을 물로 축여서 먹이면 누에가 살아나게 된다. 지난해 뽕잎을 채취하여 가루로 만든 사실은 인공사료의 시초로 볼 수 있다.

1960년에 일본의 하마무라(氵兵 村)가 누에 인공 사료 육을 시도한 실험 보다 340년 전에 한 반도의 농촌에서는 누에 인공사육을 시행하고 있었지만 계속 발전시켜 오지 못한 점이 아쉬움을 남게 한다. 3월 중(中) 곡우(穀雨)에는 전년 가을에 베어둔 갈대로 누에 발(箔)을 만든다.

발에 누에를 기르면 무름 병, 굳은 병 등의 발생을 막아 준다. 이 절기에는 누에가 이미 크게 자라서 뽕잎을 따서 우로(雨露)를 무릅쓰고 누에를 치는데, 누에의 성질이 습기를 싫어하여 우로로 병이 발생한다.

이때는 작년에 준비한 뽕잎 가루를 사용하여 이슬 묻은 뽕잎에 뿌려서, 먹이면 습기를 없앨 뿐 아니라 고치도 다른 것보다 야물다. 누에 치고 남은 뽕잎은 따서 그늘에 말려 가루로 만들고, 종이 봉지에 담거나 옹기에 넣는다. 온돌에 두면 더욱 좋다.

그가 저술한 효빈잡기(效嚬雜記)의 양잠지요(養蠶之要) 편에서는 양잠의 요체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겨울에 누에씨(蠶種)를 펴놓은 종이를 바람이 드는 곳에 두고, 수시로 물에 담가서 얼게 하면 기(氣)를 적게 받은 놈은 죽고 살지 못하며, 기를 많이 받은 놈은 여러 차례 얼게 하여도 상하지 아니하고 함께 살아서 첫 잠부터 섶에 오르기까지 영영 누에가 강사(疆死) 하는 걱정이 없다.

둘째는 7, 8월 사이에 뽕잎을 따서 햇볕에 강하게 말려 가루로 만든다. 뽕 가루를 체로 쳐서 단지에 담는데, 많아도 지장은 없다. 만일 뽕잎이 나지 않았는데 누에가 깨어 나오면 그 가루를 온화한 물에 약간 적셔서 누에를 먹이면 좋다.

또 누에의 성질이 습기를 싫어하는데, 뽕잎이 비나 이슬에 젖었으면 뽕잎 가루를 뽕잎 위에 뿌려서 먹이면 좋다. 비단, 누에의 성질만이 아니고 고치를 지어도 굳고 단단하여 실을 배(倍)로 얻을 수 있다. 항상 양잠을 하는 사람은 꼭 알아 두어야 할 일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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