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와 아내의 이야기

경북대학교 윤재수 명예교수

충청지방에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가운데 누에와 관련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비와 아내의 이야기입니다. 옛날 옛날에 충청도 어느 고을에 가난한 선비 부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선비랍시고 책읽기에만 골몰할 뿐 가정일은 돌보지 아니하여 아내가 도맡아 집안일을 꾸려가고 있었습니다. 아내는 낮에는 이웃집 방아질을 거들어 주고 양식을 마련하였고 저녁에는 삯바느질을 하여 푼돈을 받아 건건이 살림을 꾸려갔습니다.

아내는 육체적 피로를 참으면서 남편의 글 읽는 모습이 아름다웠고 대견스럽게 생각하면서 남편이 과거에 급제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어 행복한 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희망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가파르고 흠준한 산에 가서 땔 나무를 잘라 지개에 지고 오면서도 희망에 부풀어 기쁘기만 하였습니다. 때로는 들녘에 나가 개울가에 자라고 있는 피(稊稗) 이삭을 잘라 모아 양식을 하여야 하는 궁핍한 생활 속에서도 남편을 바라보면서 잘 살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슴에 안고 삶의 고통을 참았습니다.

남편이 과거 시험 준비한 지도 3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또 3년이 지나는 동안 과거 시험을 3번이나 보았지만 번번이 실패하였습니다. 아내는 점점 희망을 잃어 가고 있었습니다. 3번이나 과거 시험에 낙방을 하면서도 집안일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남편이 미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아내는 땔 나무를 하려 가려고 지게를 지면서, 구름이 몰려오는 하늘을 바라보고 남편에게 신신 당부를 하였습니다. “만약에 비가 오면 피를 늘어놓은 멍석을 정리하여 처마 밑 댓돌 위에 올려놓아주십시오”하고 부탁한 후 산속을 향하여 걸음을 옮겨 갔습니다.

깊은 산속에서 소나무의 마른 가지를 잘라 차곡하게 나무를 지게에 쌓으려 할 때, 검은 구름이 하늘을 가리면서 소나기를 퍼붓기 시작하였습니다. 소나기 줄기는 강하였고, 산골의 물은 삽시간에 콸콸 흘러내렸습니다.

아내는 나뭇짐을 지고 급하게 집으로 달려왔습니다. 지개와 옷이 빗물에 젖어 어깨를 짓 눌려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아내가 싸립 문을 들어서는 순간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목격되었습니다.

마당에는 물이 고여 강물을 이루고, 피를 늘어놓은 멍석은 둥둥 떠 빙글 빙글 춤을 추고 있지만, 방에서는 글 읽는 소리만 낭랑하게 펴져 나오고 있습니다. 순간 아내는 서러움과 울분이 한꺼번에 복받쳐 올라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저런 얼빠진 사내와 평생을 함께 살아간다면 고생만 할 것이 분명하니 부부의 인연을 끊어 버리겠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선비인 남편은 노기 띤 아내의 얼굴을 하소연하듯 바라보면서 긴 한숨을 내시었습니다. 그리고 힘없이 말하였습니다. “여보 조금만 참아 주면 좋을 텐데...” 무력한 선비의 연민의 호소를 뒤로하고 여인은 간단한 짐을 챙겨 머리에 이고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그날부터 선비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정신으로 윤집궐중(允執厥中), 학문에 정진하여 과거에 장원 급제하였습니다. 나라 임금님은 그 선비를 고향 이웃 고을 원님으로 교지를 내렸습니다.

선비는 임금님의 명에 따라 말을 타고 몇 사람의 군졸을 대리고 이웃 고을로 행차하는 도중 고향 마을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말안장에 높이 앉아 고향 들판을 감회 깊게 바라보았습니다. 저쪽 논둑에서 등에 아이를 업고 피 이삭을 훑는 아낙을 보았습니다.

유심히 살펴보니 몇 년 전에 해어진 자기의 아내가 분명하였습니다. 등에 업힌 아이를 보니 다른 사람과 부부가 되었음이 분명하였습니다. 자기를 버리고 다른 사람을 만났으나 가난은 피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원님은 마음속으로 속삭였습니다.

“아시 팔자 그른 여인이 이듬 팔자 별수 없다.”라는 속담이 맞는 말이구나, “개가는 하였지만 피 바가지는 못 면했군!” 원님은 수행하는 종자를 시켜 엽전 한 꾸러미를 피 훑는 여인에게 전달하라 이르고 말고삐를 당겨 길을 재촉하였습니다.

종자에게서 엽전 꾸러미를 전해 받은 여인이 말 타고 가는 원님을 자세히 살펴보니 몇 년 전에 헤어진 남편 선비가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지아비를 두고 개가한 몸이니 사라져 가는 원님의 뒷모습만 바라볼 수밖에 별수가 없었습니다.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원님의 뒷모습이 사라질 무렵에 여인은 흐느끼며 눈물을 뿌렸습니다. 잠시의 어려움을 참지 못한 후회스러움이 불길처럼 솟아올라 심장을 달구어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뒤따라 오던 종자가 전하는 여인의 소식을 듣고 원님이 되돌아와 여인을 보았을 때에는 여인은 숨결이 끊어진 차가운 몸이 되어 있었습니다. 측은한 마음에 여인의 몸에 손을 대어 시신을 수습하였습니다. 공중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죄 많은 여인은 죽어서 나마 누에가 되어 고치를 짓고 명주가 되어 선비님 몸에 감겨 선비님을 보호하겠습니다.” 여인의 시체에서는 수많은 누에가 기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뽕나무에 올라 뽕잎을 먹고 고치를 지었습니다.

원님은 여인을 후하게 장사지내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고치를 따서 명주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로부터 사람이 생을 다하고 목숨을 마감하면 수의로 명주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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