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한심스럽다 못해 화가 치민다. 자연과학과 문명의 발달로 인해 지식인이 늘고, 세상 살기가 편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된 까닭인지 세상 사람들은 더욱 흉악해지고, 말도 거칠어져가고 있는지?

정치는 물론 경제까지도 엉망진창이 되다 보니 애꿎은 국민들이 고통을 당하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런 세상이 되다 보니 카드빚을 갚는다는 이유로 부모를 죽이거나 사람을 쉽게 살해하면서도 가책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인명경시로 각종 범죄가 늘고 있는 실정이다.

교육수준이 높아지고, 현대 문명도 발달되어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고 하면서도 이 사회가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인간들의 근성이기도 한 인성이 사라지면서 사람들이 점점 더 악해져 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물질만능 시대가 되면서 부패하고 악해진 인간성이 갈수록 포악해져 마침내는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말세가 되면 특히 두드러질 인간의 악한 면을 여러 가지로 표현하고 있지만 그중에도 ‘자기애’ 가 너무 강해지다 보니 악이 자연적으로 성행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자기애’는 다른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앞세우는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남의 생명까지도 빼앗을 정도로 악해져 마치 마귀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의 특징은 하나같이 재물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는 돈만이 자기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가장 큰 힘을 가졌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돈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급기야는 부모, 형제, 가족 심지어는 이웃에게까지 고통을 주며 상처를 입힌다. 부모와 자식 간에 갈등이 생기고 결국에는 철천지원수가 되기도 한다.

근세 들어서면서 ‘한 가족 한 자녀’ 운동이 확산되면서 부모의 잘못된 교육으로 자녀들이 자기애에 한껏 빠져 자기만을 알고 살게 되다 보니 이웃에 대한 배려와 사랑이 결핍 현상을 보이고 있다.

물질을 우선으로 생각하다 보니 부모 형제에게도 실익을 따지면서 함부로 대하게 된다. 그런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다른 사람, 이웃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나눌 수 있겠는가. 부모를 불신하고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국가의 권위를 인정하고 스승과 선배의 권위 앞에서 순종하는 마음이 될 수 있을까.

예전에는 그나마 대가족 시대에는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 형제자매들이 한곳에서 어우러져 살았다. 어른 공경을 알았고, 또 ‘나’ 외에도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 배려할 줄 아는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나눔의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핵가족화가 되면서 혼자 생활하고, 가족들과의 어울림의 시간도 없다 보니 자연스럽게 게임에 빠지게 되고, ‘자기애’에 깊이 빠지게 되는 것이다. 어쩜 가정은 작은 사회이자 교육기관이다.

작은 사회가 밝고 맑으면 이 사회가 맑은 사회가 될 수 있고, 가정교육을 잘 받게 되면 이 사회가 아름답고 밝은 사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험악한 사회를 탓하기 전, 가정교육을 어떻게 했는가를 먼저 생각해보아야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잘하는 일보다 나쁜 행위에 대해 ‘남들도 다 하는 데 뭘 그래’ 하며 가책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다. 지금 같은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실의에 빠져 삶의 의욕을 잃고 있을 정도지만, 그 고통을 고통으로만 여긴다면 밝은 미래를 생각할 수 없다.

역경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지는 못하지만 사람을 지혜롭게 할 수는 있다. 주위를 살펴보면 자신보다 더 힘들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고난의 길, 역경이 닥쳐와도 문제를 통해 자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스스로 찾으며 성숙해져간다.

그리고 그 역경과 실패를 통해 교훈을 얻게 되는 것이다. 얼마 전 한 친구가 사장이 시키는 비윤리적인 업무를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분한 마음에 치를 떨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회사가 비리를 통해 회사가 운영되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장을 비롯한 임원, 잘 나가던 직원들이 줄줄이 쇠고랑을 차고 수감되는 것을 뉴스에서 보게 되었다. 잘 나가는 것 같은 그들은 쇠고랑을 찼지만 그 친구는 아무 일도 없었다.

이를 두고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는 어떤 한 문제로 인해 또 다른 큰 문제가 발생할 때 상처를 받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이 같은 시련을 통해 인격이 성숙해지며 인격과 삶이 더욱 아름답고 완전하게 만들어지는 것이다. 과거에는 교육과정에 ‘윤리’ ‘사회’ ‘도덕’ ‘반공’ ‘과학’ ‘글짓기’ 등의 과목이 있어 인간으로서 갖춰야 할 인간 교육을 받았다.

그래서 부모와 어른들을 존경할 줄도 알았고, 또 이웃과 함께하며 나눔의 삶을 살았었다. 형제들과도 우애가 깊었다. 그런데 지금의 교육은 산교육이 아니다. 오직 취업을 위한 지식. 세뇌교육이 되다 보니 인간교육을 받은 인간이 아니라 차갑고 정확한 기계가 되고 있다.

인간의 따뜻한 마음이 아니라, 계산적인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주위에 있는 사람이 어떻게 되든 자신의 목적만 이루면 된다는 식이다.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다 보니 재산을 취하기 위해 자신을 낳아준 부모도 살해하고, 또 자식까지도 죽여서 보험금을 타먹는 부모, 남편을, 아내를 자식을, 죽이면서도 가책이 없는 인간의 탈을 쓴 원칙만 따지는 기계 같은 사람으로 살면서 험악한 사회가 되고 있다.

아침이면 해가 뜨고 저녁에 달이 뜨면, 어둠이 오고, 하루가 가듯이 우리의 삶도 언젠가는 끝나는 날이 오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날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어둠도 탓하지 말고, 남을 원망하거나, 불행하다 생각지도 말자.

아직은 그래도 세상이 존재하고 있는 것은 10명의 의인이 있어서다. 전교조 출신 교사들이 왜곡 된 교육을 해도, 정치계가 썩어 악취가 나도, 법조계가 부패. 부조리로 도배되었어도, 아직은 정직하고 선한 교사. 정치인, 법조인 몇 명이 있기에 하늘에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살아있어야 할 이유는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 마음을 잊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좀 더 밝고 맑은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도 옛말이 되었다. 소를 잃으면 그만이다. 외양간 고칠 생각을 안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악한 끝을 생각하고, 외양 깐 고치기 전에 ‘소’를 잃지 않도록 미리 준비해야 한다.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역사. 도덕. 윤리. 사회. 반공. 과목을 신설, 교육을 실시하면서 소를 잃고 외양간 고치는 '우'를 범하지는 말자. 그 어느 때 보다 인간 교육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다.

[시인. 칼럼니스트. 열린사이버대학 실용영어학과 특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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