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클럽에서 주관하는 문화 탐방을 할 기회가 있어 부여를 가게 되었다. 백제 왕릉 원을 지나 부소산성을 거쳐 고란사(寺)를 가는 길에서 앞서가는 노인들이 나누는 대화가 무척이나 살갑고 푸근하게 들려왔다.

또래 친구들인 것 같다. 우정이 가득 깃든 푸근한 반말로 주고받는 것이 그렇게 느껴졌다. 대화의 내용을 들어보면 다른 이들과는 달리 자신의 손주들의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자식들보다는 손주들이 더 귀엽고 사랑스럽게 생각한다. 다정한 우정의 친구들이기에 이런 반말도 다정다감하게 들린다.

그러나 이런 반말이 우리 사회의 막말 풍토와 궤를 같이 한다면 문제는 사뭇 달라지고 심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문득 반말과 막말을 마구 쏟아내는 국회의원들이 생각났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는 막말이 마치 일상의 언어인 양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막말은 생리상 반말로 시작해서 반말로 끝나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삿대질과 폭언. 폭행으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사회적 문제로 될 수 있다.

국회의원들을 생각하면 바로 쉽게 떠오르는 것이 반말. 폭언. 폭행을 하는 추잡한 모습이다.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무지한 국회의원들에 대해 뾰족한 대책 마련은 되지 않고 있어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오래전 장례문화 취재를 위해 잠시 독일에 체류한 적이 있었다. 그때 독일인에게 들은 말이 생각난다. 독일에서 체류할 때 우연히 싸움을 하는 것을 구경하게 되었다. 서로 고함지르고 언성을 높이며 싸움을 하는데 반말을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갑자기 서로에 대해 존댓말을 하는 것을 보고 매우 의아해 했다. 반말인 ‘너(Du)’ 가 존대어인 ‘당신(Sie)’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로 주먹을 불끈 쥐고 허공에 휘두르면서 상대방에게 먼저 자신을 치라고 몸을 내민다.

구경거리라고 생각하며 호기심 있게 보았는데, 예상외로 그 싸움은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그 이유를 독일인에게 물어보았다. 독일에서는 상대방 몸에 먼저 손을 휘두르는 자는 ‘지위 고하’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가해자’가 되고 법정 불이익이 따른다고 했다.

특히나 법대생의 경우 몸싸움에 연루된 기록이 남으면 판사. 검사 시험 자격이 박탈되기 때문에 몸싸움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다. 독일의 사회질서를 이끄는 시민들의 준법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또한 야구 경기장에서 유독 감독들이 정장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풀렸다. 간혹 외국 야구 경기장에서 감독과 심판이 손과 팔을 뒷짐 지고, 배를 맞대며 격하게 어필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농구 감독도 늘 정장 차림인 것의 깊은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것 같다. 필자의 경우 언론사에 재직할 때, 상급자는 물론이지만 하급자, 특히 딸 같은 기자들에게도 반말을 하지 않고 존대어를 사용했다.

지적을 할 때 발생할 수 있는 격한 반응을 존대어를 쓰면서 감정 자제는 물론 상호 간에 감정대립을 미연에 방지하는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존대어를 사용하고 직위와 관계없이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날 때마다 인사를 한 것도 지금 생각하면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후배 기자들을 만나면 ‘존댓말을 쓰고, 인사를 잘하든 선배’로 기억되고 있다는 말을 한다. ‘존댓말을 쓰고, 인사를 잘하다 보니 함부로 할 수도 없었고 어려웠다’는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흔히 일반사회조직에서나, 군(軍)이나, 특수 조직에서는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지시사항을 반말로 해야 권위가 서고 잘 ‘먹힌다.’는 의식을 갖고 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존대어는 ‘듣는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쓰이는 말’로 반말은 ‘함부로 낮추어하는 말’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렇듯 존대어는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 뜻이 담겨 있지만 반말에는 상대방의 인격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사전대로라면 더욱이 존대어는 우리 사회에서 조직 언어로서 자리매김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가까운 사람일수록 반말을 하거나, 막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지적하고 싶다. 반말 소통이 아무리 살갑고, 푸근하다 할지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불필요한 오해 소지를 남길 수도 있고, 소통 언어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근간까지도 국회의사당과 법정을 비롯해 기업 등 사회 곳곳에서 횡행하는 갑 질들의 반말, 막말과 폭언 형태는 이미 인내의 한계를 초월해 많은 사람들을 깊은 우울증의 늪으로 몰아가며 삶의 의욕을 잃어가게 하고 있다.

존경을 받으며 순종하는 것과 복종하는 것은 그 의미가 엄청나게 차이가 있다. 참으로 묵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삶에 지친 탓일까 모두가 무관심이다. 많은 지식 교육도 절대적으로 필요하지만 이 사회를 바르고 맑은 사회로 만드는 방안 중 하나가 존대어가 사회조직의 언어로서 일상화되는 것이다.

존대어는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막말이나 반말이 설자리가 없다. 비록 단순하지만 큰 의미에서는 밝은 사회가 될 수도 있다. 존댓말에 이어 바람이 있다면 ‘칭찬의 언어’를 들지 않을 수 없다.

칭찬은 말 그대로 잘 한 것에 대해 격려를 함으로서 사기를 높여 주는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까지도 있다. 실제로 칭찬을 많이 듣는 고래가 더 많이 뛰고 반응도 더 잘 보인다고 한다.

이렇듯 칭찬이 중요한데 정작 우리는 무궁무진하고 마르지 않는 칭찬에 대해 매우 인색하다. 심지어는 “난 아부 같은 것은 못하는 성질”이라고 말하며 ‘아부’ 와 ‘칭찬’을 혼동하기도 한다. 칭찬은 위, 아래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이다.

‘고도원의 아침편지’를 보면 ‘칭찬은 숨바꼭질, 보물 찾기와 같다. 되도록 눈을 크게 뜨고, 바싹 다가가야 찾을 수 있다. 진심과 사랑이 담긴 따뜻한 눈으로 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라고 적혀있다.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빈부를 가리지 않고 칭찬을 먹고 자란다. 비록 실수와 허물로 얼룩진 인생이라 할지라도, 그의 가능성을 보고 칭찬해주는 이가 주위에 있다면 그 사람은 의욕을 갖고 변화된 삶을 살 수 있다.

칭찬은 사람을 단련시키고, 성장시키며, 밝은 사회를 만드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칭찬을 하는 사람에게 칼날을 세우지는 않는다. 20대 국회의원들은 개만도 못한 19대 국회의원들과는 달리 국회의사당에서 서로에게 먼저 인사하고, 존대어를 쓰면서, 서로를 칭찬하는 의원들이 되기를 소망해본다.

[시인. 칼럼니스트. 열린사이버대학 실용영어학과 특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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