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무드에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과 가장 강한 사람? 그리고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물음의 글이 있다. 그 답은 이렇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서부터 배움을 가진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또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렇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인격적으로 성숙한 사람이요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감사하는 삶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행복의 원천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감사가 있는 곳에는 은혜가 있고, 사랑이 있다.

그곳에는 섬김이 있고 천국이 있는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면 축복과 기쁨이 함께 한다. 성경에도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라고 명령하고 있다. 감사의 생활은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다. 감사의 삶을 살려면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에서일까, 어떤 식자(識者)가 말하기를 ‘사랑’이라는 말은 ‘사량’(思量), 즉 ‘생각하는 양’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언어학적으로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재밌는 말로 one two have yes(일 리가 있네)다. 그 '식자'의 말처럼 사랑이 ‘생각하는 양’이라면 사랑을 할수록 감사의 마음도 많아질 것이다.

결국 생각을 많이 하면 사랑도 깊어지고, 감사의 양도 많아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으로 풀이된다. 혹자는 자신이 아무리 생각해도 감사할 일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감사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자신을 낳으시고 키워주신 부모에 대해 감사하고, 또 늘 정성스럽게 식탁을 차리는 아내, 건강하게 잘 자라주는 자식들, 직장에서 가족들을 위해 하루 종일 일에 찌들이는 남편이자 아버지. 또 저녁이면 편안하게 안식을 취할 수 있는 따뜻한 가정이 있고, 자신을 기다려주는 사랑스러운 가족이 있음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주위를 보면 정작 우리가 눈길을 돌려야 할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독거노인, 소년소녀 가장, 장애인, 빈곤한 소득층,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추위와 굶주림에 떨며 마음까지도 가난해진 거리의 사람들이 이외로 많다는 것을 안다면 자신이 불행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걷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보지도 못하고,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 병들어 고통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사람, 속이 안 좋아 식사를 제대로 못하는 사람, 내일 아침 해를 보기를 갈망하는 사람들, 단순하게 그들만 보더라도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자신보다 못 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보이는 것은 없어도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성스러운 존재로서 사지(四肢)가 멀쩡하고, 건강한 육체가 있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또 어디든지 갈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와 손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을 볼 수 있는 눈이 있고, 사랑한다는 의사표시를 할 수 있고 언어를 구사할 수 있으며 튼튼한 소화력이 있어 음식도 잘 먹는다면, 그리고 잘 싸고, 잘 먹고, 잘 잔다면 바로 그게 축복이고 그 또한 감사할 일이 아니겠는가.

어떤 상황이 벌어졌다 해도 더 크게 나지 않았음에 감사를 해야 한다. 특히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감사의 마음이 된다면 힘겹고 괴로운 삶이라도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따라서 감사의 삶은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감정과 생각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와 전혀 다른 색채, 전혀 다른 깊이의 새로운 이치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어떤 이는 ‘무소유’를 강조하기도 했지만, 이 세상 떠날 때는 육신까지도 놓고 간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렇게 물질에 대한 애착을 갖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지나친 욕심 때문에 우리는 감사할 줄을 모르고 사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달리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태초부터 인간은 더불어 살도록 지으심을 받았고,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이브는 우리에게 더불어 사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축복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상대방을 축복하고 그 축복으로 하나님의 평안을 이루며 감사하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토록 우리에게 소외되고 가난한 자를 위해, 이방인을 위해 그들과 더불어 살라 하신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더불어 함께 산다’는 것은 말로만 사랑하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함께하며 감사의 마음으로 사는 것이다. 결국 더불어 산다는 것은 내가 마음을 비우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그래서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는 자체도 역시 감사다.

욕심이 많은 사람일수록 감사의 마음을 가질 수 없다. 득롱망촉(得隴望蜀). 이는 ‘농서 땅을 얻자 촉나라까지 갖고자 하는 욕심’으로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비유해서 한 말이다.

후한을 세운 광무제 유수가 천하통일을 막 이루려고 할 무렵, 대부분의 인근 나라들을 정복했지만 ‘농서’와 ‘촉’ 만은 복속시키지 못하고 있을 때 농서의 군주인 외효가 죽자 그 아들이 유수에게 항복을 했다.

이때 유수가 “인간은 만족할 줄 몰라서 농서를 쉽게 얻고도 촉 땅까지 갖고 심은 욕심을 부리는 구나”라는 말을 했는데 그게 바로 득롱망촉이라는 사자성어다. 유수처럼 과욕을 부리면 감사의 마음으로 살 수 없다.

우리가 버리고 비우면 채워지는 원리를 안다면 많이 가졌다고 행복해지고, 적게 가졌다고 불행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이 부자이면 다 행복하고 감사할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할 날도, 누군가에 감사할 날도 결코 길지도 않은데 남은 세월이 얼마나 된다고 불평과 미움으로 가슴 아파하며 살아야 하겠는가.

버리고 비우면 또 채워지는 것이 있음을 안다면, 작은 것 하나에도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이 되어서 사랑을 베푸는 소중하고 귀한 삶을 사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필자의 경우 7년 전부터 코가 뚫려(천공) 냄새를 맡지 못한다. 삼사일에 한 번씩 이비인후과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 하루에 두 번씩 코에 약물을 주입시키고 약을 바른다. 번거롭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콧속이 막혀 호흡이 곤란해진다.

수술을 해야 하는데 의료진이 난이(難貽)한 수술로서 콧속이 되어서 반영구적이면서 또 나이가 많아 수술이 어렵다고 했다. 큰 수술을 한 경우 생긴다는 데, 아마 코를 너무 세게 풀 은 것이 주원인인 것 같다.

그동안 아무 냄새도 못 맡아 불편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필자가 악취가 나는 곳에서 일을 하면서 느끼는 것은 그 냄새를 못 맡는다는 것이다.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를 하게 되는지 모른다. 냄새를 못 맡지만 감사의 생활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 같았다. 아멘.

[시인. 칼럼니스트. 열린사이버대학 실용영어학과 특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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