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에 육덕충이란?

경북대학교 윤재수 명예교수

사람들은 누에를 이용하여 의복을 만들고 또는 건강식품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누에의 생육 도중에 누에를 죽여야만 했습니다. 누에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억울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생육초기에는 자신들을 보호하여 주고 먹이를 주기 때문에 고마워했습니다.

그러나 생을 마치기도 전에 생명을 잃어버립니다. 중국 사람 황성증(黃省曾)이란 사람은 잠경(蠶經)이란 책을 만들어 누에를 육덕충(六德蟲)이라 칭송하면서 마음을 달래기도 하였습니다. 육덕충이란 6가지 덕을 가지고 있은 곤충이란 뜻입니다.

첫 번째 덕은 천하생령의피인(天下生靈衣被 仁)입니다. 즉 인(仁)입니다. 세계 사람들에게 추위를 막아주고 아름다움을 주는 벌레입니다. 두 번째 덕은 식취직사주인은공오답의(食取職死主人恩功報答 義)입니다.

뽕을 먹고 자기 직분에 응당한 생을 다하여 주인의 은혜에 보답하는 의로은 벌레입니다. 셋째 덕은 탕화액불사 충(湯火厄不辭 忠)입니다. 끓는 탕 속에 들어가도 불평을 하지 않는 충성스러움입니다.

넷째 덕은 필사면사기 신(必四眠四起 信)입니다. 반드시 4번 자고 4번 일어나는 믿음입니다. 다섯째 덕은 물형상징영견 지(物形象徵營繭 智)입니다. 뽕을 먹고 다양한 형태의 고치를 짓는 지혜로운 벌레입니다.

여섯째 덕은 신(神)입니다. 사람들은 누에에게 조금은 미안한 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라의 임금은 선잠단을 만들었습니다. 제단(祭壇)이란 제물을 차리는 곳으로 다른 곳 보다 구별하여 마련한 신성한 곳으로 각종 제사에서 의례의 중심을 이루는 곳입니다.

한반도에서 선잠단의 설치는 중국의 사기에 근거하여 누에치기를 처음 시작한 중국 삼황오제의 한 사람인 황제(皇帝)의 원비 서능씨(西陵氏) 누조(嫘組)를 잠신(蠶神)으로 모시고 제사를 올리려고 마련하였습니다. 선잠단을 만든 기록은 이조 왕조 실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태종 14년 6월 13일 예조에서 규모를 아뢰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잠단(先蠶壇)은 높이가 3척(尺), 둘레가 8보(步) 4척(尺)이고, 4방으로 나가는 계단이 있다. 신위(神位)를 단 위의 북방에 남쪽을 향하여 설치하고, 자리는 왕골자리로 한다. 그러나 관리를 소홀히 한 때도 있었습니다.

성종실록 35권, 성종 4(1473)년 10월 25일 계미 4번째 기사에는 예조(禮曹)에서 계달하기를, "무릇 제향의 단유(壇壝)가 모두 옛 제도대로 되지 아니하였으니, 신(神)을 섬기는 예의에 미진한 바가 있습니다. 삼가 상고하건대, 본조(本曹)의 수교(受敎)에는 이러하였습니다.

‘선잠단(先蠶壇)을 만든 것이 제도에 맞지 아니하여 바닥의 고름세[面勢]가 기울어지고, 흙에 모래와 자갈이 섞여서 심은 뽕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니, 그래도 제비(帝妃)의 영혼이 여기에 있어 오르내린다고 하겠는가?

또 악기(樂器)에 다는 기구로 난조(鸞鳥)·봉황(鳳凰)·벌레·짐승과 같은 장식(粧飾)과 기(旗)·꿩깃·유소(流蘇) 따위는 비나 눈을 한 번 맞으면 쉽게 떨어지는데, 봉상시(奉常寺)에 간직하여 다른 제사에 통용하여 옮기고 왕래하니, 1년이 되지 못하여 모두 훼손(毁損) 되었고, 또 신주독(神主櫝)을 봉상고(奉常庫) 안에 두었다가 제사 때가 되면 하인들이 어깨에 메어다가 올리니, 무례(無禮)함이 더욱 심하다.

우사단(雩祀壇)·선농단(先農壇) 곁에 선잠단(先蠶壇)을 쌓고, 모든 제단(祭壇)의 곁에다가 집을 세워서 신주를 안치하며, 창고를 세워서 제기와 악기를 간직해 두고, 지키는 자로 하여금 단(壇) 옆에 모여 살게 하여 전토를 주고 잡역(雜役)을 없애어 삼가 지키도록 하여서, 거칠고 무성한 잡초를 깎아내고 도둑을 방비하게 하면 단유(壇壝)가 완비(完備) 되어 신(神)을 섬기는 예가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법을 세우는 데에 자세하고 극진함이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유사(有司)에서 옛날대로 하고 폐하여 이제까지 행하지 아니하니, 대체에 온당하지 못 합니다. 청컨대 이제부터 무릇 단유(壇壝)는 [오례의(五禮儀)]에 의하여 수축하고, 선잠단을 우사단·선농단의 곁으로 옮겨 마련하며, 세 단(壇)의 중앙과 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 옆의 편리한 땅에 집을 세우고 창고를 세워서, 예전의 수교(受敎)에 의하여 시행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선잠의 제사는 국왕이 관심을 가져 왕명을 내릴 만큼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왕실의 행사로 설정하고 매년 잠신께 풍잠을 기원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행사는 성종 8년(1477)에는 창덕궁 공원에 채상단(採桑壇)을 신축하여 왕비의 친잠례를 거행하고, 선잠단에 관리를 보내 제향의식을 매년 3월에 행하여 오다가 중종 원년(1506년)에는 여러 도의 잠실을 서울 근교로 집결시켰습니다.

그리고 대한 제국(大韓帝國) 융희(隆熙) 2년(1908년) 7월 선잠단이 선농단(先農壇)의 신위와 함께 사직단으로 옮겨 배향되었고 일제 때 훼손되어 원래의 모습은 찾기 어렵고 현재는 서울 성북구 성북동 63-1, 64 번지에 『선잠단지』라는 팻말이 세워지고 주변을 정리하여 보존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사적 제83호로 지정하였고, 대한제국 말 중단되었던 선잠제는 85년 만인 1993년 재현하여 매년 전통문화 행사로 『선잠제례』를 실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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