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와이스(Robert Weiss)가 쓴 ‘고독한 사회악’을 보면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웃과의 만남이 단절되고 배신감을 느낄 때가 가장 고독함을 느끼게 된다고 했다.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혼자는 살수 없는 사회조직적인 삶을 영유하는 인간은 또 한 사람의 만남을 시작으로 행. 불행의 맛을 음미하며 짧은 인생을 엮어간다. 그래서 한자로 인간(人間)은 서로를 기대고 의지하는 인(人)과 간격을 뜻하는 간(間)으로 지칭되고 있다.

이 같은 관계를 역설한 사람 중 ‘마 틴 부버’는 그의 저서인 ‘나와 너’에서 인간관계는 나와 너(I and You)의 관계가 아니면 나와 그것(물질. I and it))의 관계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소중한 만남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며 맞이하는 것일까. 앞서 언급했듯 인간은 만남으로부터 삶이 시작된다.

환경과 만나게 되고 가족을 시작으로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일평생 타인과의 만남에 따라 어떤 이는 행복을, 어떤 이는 불행을, 또 어떤 이는 기쁨과 슬픔을 만나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이와 같이 인간이란 구조적으로 시시각각 만남을 통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니고 있는 동물이다. 그런 연유에서 어떤 환경과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느냐에 따라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행. 불행의 사람으로 결정지어진다.

그런 만남의 관계를 우리는 흔히 ‘인연’(因緣)이라고 말한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인연(hetu-pratvava 또는 nidana)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분. 또는 사람이 상황이나 일. 사물과 맺어지는 관계라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인연은 ‘원인’을 의미하는 불교 용어다. 인(因. hetu)은 결과를 산출하는 내적. 직접적 원인이며 연(緣. pratyaya)은 결과의 산출을 도와주는 외적. 간접적 원인이다. 고타마 붓다는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으로써 생겨나고 인연으로써 소멸하는 연기(緣起. nidana)의 이법을 깨우쳤다고 한다.

아함경(阿含經)에서는 인간이 미망(迷妄)과 고통의 존재임을 12인연으로 설명하고 인간의 윤회 과정에 해당시켜 해석하고 있다. 이 세상은 인연 따라 만들어지고 인연 따라 소멸하는 인연생기의 법칙에 따라 돌아가고 있다.

이 세상이 움직이는 법칙이 바로 ‘인연과보’의 법칙인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인연에 잣대를 갖고 좋고, 싫은 것으로 구별하며 좋은 인연은 애착하여 더 잡으려 하고,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인연, 또는 맺어서는 안 될 잘못된 나쁜 인연(악연. 惡緣. aghast. appalled)은 애써 떨쳐버리려고 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 ‘이승에서 짧은 순간의 만남도 전생에서 수천 번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의 참 의미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오랜 기간 만남의 사람은 전생에 수 억겁(劫)의 ‘연’이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인연이 아닐 수 없다. 어떤 한 사람과의 만남.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 중에 유독 그 사람과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 숱한 사람들과 그 숱한 시간 속에서 나와 만났다는 사실은 설사 그것이 아무리 짧은 만남의 순간이라도 우리에겐 대단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만남이라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이별’이라는 말을 아주 쉽게 내뱉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좋은 인연의 만남으로 행복감에 젖어 웃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못된 악연으로 만남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불행과 실패로 인한 슬픔에 빠져 이를 갈며 울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곧 ‘복’이다. 좋은 만남은 인격적인 만남이다. 좋은 만남이 되기 위해서는 그 만남의 시간이 즐거워야 함은 물론 자기를 던져 남에게 베풀고 나누는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마음속 사랑은 다 퍼내도 마르지 않고, 넘치지도 않고 부도도 나지 않는다. 성경에도 좋은 인연의 만남을 통해 축복을 받은 자가 있다.

재력은 있으나 유대 백성들에게 왕따를 당하면서 매국노, 사기꾼 소리를 들으며 외롭게 살던 세리 장(오늘날 세무서장)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참 사랑을 알게 되어 평안한 새 삶을 찾기도 했다.

반면 예수를 유대인들에게 팔아버린 가롯 유다와의 만남은 악연이다. 가롯 유다는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리게 한 후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며 자살을 했지만 불행한 사람으로 생을 마감했다. 쉽게는 정치인 이회창과 이인재, 나경원과 안철수의 만남은 악연이다.

그런 사람을 만남으로 이회창. 나경원은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입었으나 어디에서도 보상을 받을 수는 없다.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초에 정도전과 이방원. 당파 싸움에 휘말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조광조. 당 한 사람만 억울하고 분할뿐이다. 그게 작금의 현실이다. 얼핏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네 글자가 떠오른다.

좋은 씨앗을 뿌리면 좋은 열매를, 나쁜 씨앗을 뿌리면 나쁜 열매를 거두게 된다. 반드시 자신이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다. 후세에까지도 이어진다. 최근 정치인들의 행태를 지켜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에서 분노가 치솟지만 그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치욕스러울 정도의 추태까지 보여 가며 저토록 자리에 연연하고 싶을까 하는 연민의 정(情) 마저 느끼게 한다. 국가와 국민을 생각하기보다 자신들의 계보에 의해 상대를 헐뜯고, 비방하는 모습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자기는 옆으로 걸으면서 남에게는 똑바로 걸으라고 하는 게 같은 사람들이다. 자신의 영달을 위해 모두가 악연의 관계가 되고 있지만 훗날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 유행가 가사에도 있듯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다.

만남이 있으면 반드시 헤어짐도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따라서 그렇게 살다 보면 어디에선 가는 또다시 만나 해후를 하게 된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옛 속담처럼 우리의 만남이 원수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

필자가 사는 지역의 예술문학단체가 안타깝게도 기존의 세력들이 기득권을 내세우며‘안하무인’(眼下無人)으로 문화발전을 저해하는 악연을 만들고 있다. 예로 당장에 뚝 틈새로 흘러나오는 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

무관심 속에서 그 뚝이 터져 마을이 침수될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권위와 교만함이 대단한 것 같아도 알고 보면 대단히 추한 것이다. 아울러 겸손과 낮춤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대단히 아름답고 귀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세상을 살아가다 힘든 일 있어 위안을 받고 싶을 때 그 누군가, 이 세상 살아가다 기쁜 일 있어 자랑하고 싶을 때 그 누군가가 바로 ‘당신’이고 ‘나’이기를 바란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다. 생각만 해도 눈물이 날 정도로 안타깝고 슬프다. 짧은 삶일지라도 아름다운 추억으로써 꼭 다시 만나고 싶고, 그립고, ‘잊을 수 없는 사람’으로서 ‘내 가슴’에 꼭꼭 깊이 간직되는 그런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남아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이었지. 라며 떠남을 아쉬워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와의 만남으로 모두가 기뻐하고 함께 즐기며 없을 땐 그리운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좋은 인연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린 모두 아낌없는 사랑을 나누며 이해하는 마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참 좋은 인연은 시작이 좋은 인연이 아니라 마지막(끝)이 좋은 인연’이다.

‘우리는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는 일’ 인 필연(必然 inevitability)의 관계가 되어야 한다. 필연의 좋은 만남으로 사랑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밝고 맑은 사회가 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전생에 어떤 연(戀)이었나/ 머리로 가슴으로 타고 내리며/ 한 치 마음을 촉촉이 적시는 빗방울만큼/ 베어나는 숱한 아픔의 얼룩들/ 무슨 한(恨)이 그리 남아/ 촉촉한 가을을 적시며/ 흐느끼는가/ 그대 연(緣)이여./ 잡을 수조차 없는 연(宴)/ 조각난 그리움 엮는 비에 나그네/ 오늘도 먼 산 바라보며/ 길 없는 길을 홀로 떠난다.” <안호원의 詩 -연(鳶) 중에서->

[시인. 칼럼니스트. 열린사이버대학 실용영어학과 특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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