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기관과 지식인은 많은데 반해 세상은 상식이 전혀 통하지 않는 불통의 세상이 되어버렸다. 남을 배려할 줄도 모르고 오직 자신의 득(得)을 위해서는 정의도, 의리도 없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을까?

과거 오래전 ‘나도 할 수 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말이 유행된 적이 있다. 특히 ‘나도 할 수 있다.’(I can do)는 말은 영업부 직원들이 아침저녁으로 외쳐대던 구호이기도 했다. 물론 ‘나도 할 수 있다’라는 말의 의미는 자신감을 갖게 할 수도 있는 말이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무모한 일을 할 수도 있다는 해석을 할 수도 있다. 세상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또 ‘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도 할 수 있다’는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자칫 젊은이들이 우쭐하는 마음으로 범죄에 빠지기도 한다.

다른 친구들이 하는 것을 보고 ‘여과’ 없이 ‘모방 범죄’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절도나 폭행, 심지어 살인까지도 서슴지 않고 저지른다. 너도 하니 나도 할 수 있다는 식이다. 문제는 그런 범죄를 저지르고도 ‘나도 너처럼 해냈다.’라는 영웅 심리에서 자신의 엄청난 과오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위험천만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말 역시 잘못된 사고가 아닐 수 없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정당한 방법이 아니라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런 사고에서 내가 성공을 하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것으로 풀이된다. 나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해야 한다. 조금은 더디고 늦더라도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정도(正道)를 걸어야 한다.

우리는 소위 수도자(修道者)를 보고 ‘도를 닦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수도자는 종교인뿐만 아니라 배우는 사람들은 모두 해당될 수 있다. 그런데 왜 수도자에게 도를 닦는 사람이라는 말에 길 도(道) 자를 쓰는 것일까?

이는 성인의 말씀을 배우고 익히는 가치가 그 말씀대로 행하는 데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라 제일의 문장가 강수 선생은 “이 세상을 살면서 가난하고 비천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도’를 익히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 이다”라며 백면서생이 아닌 선비의 실천 사상을 강조한 바 있다.

성경에도 “행하지 않은 믿음은 죽은 믿음”(약 2 :26)이라고 기록되어있다. 지금은 인재를 길러내는 학교도 많고 학사(學士)에 이어 석. 박사들도 많이 배출되고,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또 종교지도자들도 많고, 사찰(寺刹)이나 교회도 많은 세상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밝아지기는커녕 지식을 이용, 이기적인 생각으로 오직 자신만을 위한 지름길을 선택하며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졌다. 수행을 잘못하고 또 잘못 가르친 것이다.

인정과 따뜻함이 있는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똑똑한 기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이 부분에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세상의 길이 이미 닦여져 있을지라도 그 길이 내가 가야 할 길이고 또 가고자 하는 목적지에 갈수 있는 길인지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있을 때 그 길을 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길이 있다 해도 무조건 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때로는 넓고 길게 보이는 길이라도 낭떠러지의 길이 있을 수도 있고, 다시는 되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길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길이라고 해서 무조건 갈 수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라는 말이 있듯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는 격언도 있다. 길이라고 해서 다 같은 길이 아니라 내가 가야 할 길 즉, 좀 더디더라도 목적지에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길이 진정한 의미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격언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야 할 길’은 과연 어떤 길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정도를 걷기보다는 지름길을 택하려 하고 먹고 사는 문제에 사로잡혀 어리석은 생각에서 상식을 벗어난 언어와 행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바라며 꿈꾸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불행과 행복이 결정된다.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내 몸이 밝아지기도 하고 어둠에 갇히기도 한다. 먹고사는 문제에 마음을 빼앗기다 보면 온몸이 어둠에 갇히며 남을 생각할 여유가 없다.

남을 배려하려는 마음은 없으면서도 자신에게 도움이 될 ‘좋은 사람’을 찾아 헤맨다. 마치 행운의 네 잎 클로버를 찾듯이 찾는다.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주위에서 좋은 사람을 찾아 헤매기보다는 자신이 더 좋은 사람이 되어 남을 배려하고 도움을 준다면 이 세상은 좀 더 밝고, 더 좋은 세상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은 구분되어 있지 않다. 내게 도움을 주면 좋은 사람이 되고, 내게 해(害)를 끼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된다. 홀로 살 수 없는 세상은 어떤 힘의 도전과 논리에 의해 쉬지 않고 온갖 변화의 형태를 조성한다.

그 힘이 선(善) 한 것인지, 혹은 악(惡) 한 것인지에 따라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선 한 힘이 강하면 아름다운 결과를 가져올 수 있겠지만 악의 세력이 크게 작용하면 부패하고 추한 세상이 될 수밖에 없다.

안타까운 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웃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간섭을 한다는 것이다. 잘 되게 하기 위한 관심과 배려보다는 간섭을 하며 이렇다 저렇다 하고 비난하며 잘못되게 한다는 것이다.

정작 관심을 필요로 할 때는 무관심으로 있다가도 관심이 필요 없을 땐 간섭을 하며 도움을 주기는커녕, 아픔과 상처를 주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비상식이 상식을 엎어버린 그런 어처구니없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핸리 로런드는 “한 여자가 자신의 아들을 인격적인 사람으로 만드는 데는 20년이 걸리지만, 어떤 한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데 걸리는 시간은 20분이면 충분하다”라고 말한다. 내 작은 관심과 말 한마디가 또 다른 한 사람을 행복하고 성공하게도 만들 수 있지만, 불행하고 실패를 하는 사람을 만들 수 있다.

우리에게 사랑이 결여되면 그 어떤 힘으로도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거나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이 필요로 하는 원천적 힘은 언제나 사랑과 함께 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학적으로 보면 우리가 다른 사람과 서로를 사랑하며 긍정적인 삶을 살면 뇌의 발달과 면역체계가 우수해지면서 우울증이나 불안감에 휩싸이지 않고 건강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관계를 ‘코이노니아’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상대방에 대해 관심을 갖고 배려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일상에서 내 작은 사랑의 말 한마디가 상대방에겐 기적이 될 수 있고, 무심코 내뱉은 사소한 말이 상대방에겐 평생의 아픔이 될 수 있고, 좌절할 수 있게도 한다. 관심과 배려의 마음을 갖지 않으려면 ‘콩 놔라 감 놔라’하는 간섭도 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마음의 중심으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만큼 자신이 행복해질 수 있다. 이런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부정적이고 편견의 마음을 버려야 한다. 똑똑한 외톨이, 독불장군으로는 살 수 없다.

적어도 자신과 가족에게만은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어 남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 한다.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려서 얻게 되는 그 길은 과연 어떤 길일까.

그 길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넓고 평탄 한 길이 아니라 좁고 협착하여 찾는 사람이 없는 길이다. 그 길이 정도의 길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가 걸어야 할 그 길이 찾는 사람이 없는 길이다.

내 따뜻한 말 한마디와 작은 관심이 상대방의 가슴을 30년 동안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시인. 칼럼니스트. 열린사이버대학 실용영어학과 특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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