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면서 누구와 자신을 비교할 때 불행이 생긴다. 세상 사람들의 얼굴과 지문이 각기 다르듯 삶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들에 핀 꽃조차 색깔과 향기가 다른데 인생을 살아가는 모양 또한 똑같을 수는 없다.

따라서 꽃을 놓고 어느 것에 기준을 두어, 그것이 최고라고 단언할 수는 없듯이 우리 인생 또한 행복에 대한 기준은 없다. 설 명절이면 오랜만에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얼마나 많은 대화를 나누었을까?

모처럼 함께 한자리에서 가족들은 어떤 말로 일상의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산업화 사회가 되면서 대화가 사라진 가정이 너무 많아졌다.

대화가 사라진 가정은 행복동맥경화증 증세가 나타난다. 가족들은 저마다 바쁘게 움직이며 최선을 다하지만 함께 하는 즐거움은 사라진지 오래다. 오히려 함께 하는 시간은 고통스러운 시간이 되고 나누는 대화도 고함과 눈물만이 있다.

이는 마음속으로 서로에 대한 열정은 있었지만 주변 환경이 행복한 환경으로 만들어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행복은 입과 귀가 좌우한다는 옛말도 있다. 행복한 가정은 대화를 통해 차이를 극복하고 조화와 일치를 이뤄간다.

대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대화 환경이다. 가정마다 신뢰와 친밀감의 정도에 따라 대화 분위기는 사뭇 달라질 수 있다. 친밀감을 나타내는 intimacy라는 영어 단어는 “into-me–see” (내 속을 들여다보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대화는 정보를 나누는 방식 이전에 서로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가정 안에서 대화들을 살펴보면 생긴 대로 말하고 나름대로 듣는다.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자신들이 관심을 갖고 귀를 기울여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한다.

마음과 생각이 서로 다르고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일까? 서로에게 좋은 말이 무엇인지, ‘사랑’을 느끼게 하는 말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고 듣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가족들과 함께 나누는 정감 있는 대화 속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는 가정이 있다면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족들 마음과 생각이 통하면 가족들이 나누는 대화는 자연적으로 행복으로 통한다. 그래서 통(通) 하는 가족은 행복한 것이다.

며칠 전 8, 10세의 외손녀들이 다투고 있었다. 가만히 다투는 것을 들었다. “너 지난번엔 내꺼 갖고 놀았으니까 이번엔 너도 빌려줘” “싫어 언니가 저번에도 인형 못 만지게 했잖아! 내꺼 만지지마!”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하려는 작은 외손녀가 지난 설에 선물로 받은 곰 모양의 인형을 언니가 손도 못 대게 하는 것이다.

“내가 언제, 너도 지난번 장난감 못 가지고 놀게 했잖아” 언니도 동생의 생떼에 화가 단단히 났는지 목소리가 커지는 것 같다. “언니는 왜 TV에서 언니가 좋아하는 것만 보고 내가 좋아하는 건 못 보게 하는 데” “왜 내 맘이다” 모두가 씩씩거리며 자기주장만 한다.

대단한 기억력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그 당시 경험했던 자존심이 남아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더 이상 진전 없는 다툼을 중재하기 위해 포문을 열었다. “너희들 계속 이렇게 싸우기만 할 거니? 내가 보니 너희들 서로 사이좋게 놀던 때도 있었잖아. 언니가 크레파스 빌려 준 적도 있었고, 너도 동생이 색연필 빌려서 그림도 그린 적 있었고....”

두 아이는 설명을 듣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있다 한 마디씩 한다. “언제요?” “그런 적 없었거든요” 우리의 삶이 바로 그렇다. 남의 배려와 관심은 쉽게 잊어버리지만, 자신이 당한 불이익은 오랫동안 선명하게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좋은 기억만 선택적으로 기억할 수 있다면 세상은 좀 더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성경에 보면 어느 날 예수님이 수제자 베드로에게 물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그동안 새벽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 한 사실이 생각나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 나이다”라고 아주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라고 부탁했다.

베드로는 이번에야말로 무슨 일이 있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굳게 다짐하면서도 제자 요한이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질 급한 베드로는 물었다. “주여 이 사람 요한은 어떻게 되나요?”

그러자 주님은 아주 냉정하게 말씀하신다. “그것이 너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주님은 비교의식 자체를 허락하시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베드로와 같이 자신의 일만 생각하기보다 남과 비교를 하려는 습성이 있다.

자신의 위치에서 보면 모든 게 다 행복한데,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하면서 스스로의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다.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꿈이 있고 만족이 있는 사람, 범사에 감사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줄 수 있는 사람은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특히 세상을 믿고, 좋은 말을 전하며 소통이 이루어지고 정직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 분명하다. 보모를 귀히 알고 가족의 소중함을 알고 이웃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 지금 자신의 일에 만족하고 성실하게 단 하루의 삶을 소중하게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명품을 말하며 갖고 싶어 하지만 정작 자신과 가족이 진품, 명품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행복을 느끼며 사는 사람이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세상은 행복하게 사는 사람보다 질병과 가난과 실패로 인해 불행을 안고 생지옥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안일과 성공을 위해 내게 ‘좋은 사람’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내게 좋은 사람을 찾으려고 헤매기보다는 자신이 먼저 남에게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한다면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런 세상은 주께서 일하시는 목장이며 주님이 지극히 사랑하시는 사람들로, 그들을 우리에게 보살피도록 위탁하신 값진 일터로 알고 사랑으로 감싸고 아름다운 대화를 하며 살아 있다는 그 자체에 대해 행복함을 같이 느끼자.

아울러 거대한 미래를 설계하지는 말자. 자칫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어 실망이 더 클 수도 있으니까. 욕심부리지 말고, 단 하루 ‘오늘’ 만 소중하게 생각하며 열심히 살자, 날이 밝아오면 늘 ‘오늘’이다. 또한 우리의 삶에 있어서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 의 마음으로 살자.

처음 만난 사람에게, 마지막 만남의 사람에게 함부로 하지 않고, 예의를 지키며 따뜻한 사랑으로 대하게 된다. 그런 마음으로의 삶이라면 이 세상은 좀 더 밝고 맑은 사회가 되고 모두가 행복한 삶을 누릴 것이다. 남과 비교는 하지 말자. 내 위치에서 감사하며 소망이 넘치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 병신년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시인. 칼럼니스트. 열린사이버대학 실용영어학과 특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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