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밥통에서 세나오는 증기에 손과 가슴에 화상을 입은 모친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서산으로 지는 붉은 해를 보게 되었다.

찌든 도심의 건물 속에서 생활하다 모처럼 뉘엿뉘엿 바다를 붉게 물들이며 스러져 가는 해를 보았다.

늘 뜨고 지는 해이련만, 무엇이 그리 바쁜지 해가 뜨는지, 지는지도 모르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가끔 밤하늘에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게 될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은 삶(生)이다. 저 달은 흘러간 숱한 역사를 알고 있겠지 하는 생각에 짧은 찬탄이 흘러나온다.

창조주가 볼 땐 아침 이슬처럼, 하루살이처럼, 짧은 삶을 사는 우리인데 마치 천년만년 살 것 같은 마음으로 바쁘게 살며 욕심을 부린다. 한때 무소유란 말이 유행어처럼 나돌던 때가 있었다.

법정 스님이 떠난 이후 그의 검소하고 욕심 없던 삶과 무소유의 사상이 많은 중생(衆生)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러다 보니 이 세상에서 무소유가 마치 큰 미덕으로 비치기도 했다.

혹자는 이 무소유에 대해서 대단히 신선해 보이지만 사실은 대단히 이기주의적이고 오직 자기만을 위한 개념이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되는 건 아니라는 논리다. 그 예로 산사(山寺)에서 수행하고 있는 스님들을 말한다.

혼자 사는 스님들이 무슨 재물이 필요하겠으며 또 그 재물을 얻기 위해 악을 쓰거나 욕심을 부리려고 하겠느냐 하는 거다. 그러나 그들에게 자기가 부양할 부모가 계시고, 자녀들이 있다면 무소유는 그렇게 큰 덕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대도 무소유를 고집한다면 늙은 부모는 굶어야 하고, 자식들은 가난의 상처와 부모의 무책임 때문에 굶주릴 뿐만 아니라 반항적이 되고 반사회적인 사람으로 타락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역설적이긴 하지만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 홀로 진리를 추구하는 종교인들, 책임감이 없는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이 무소유다. 탐욕이 가득한 이 세상에 대해 반사적으로 무소유의 개념이 떠오르겠지만 만약 모두가 다 무소유의 상태로 빠진다면 이 사회는 어떻게 될까.

결과는 뻔하다. 사회는 크게 퇴보되고, 어둡고 가난하고 궁핍이 넘쳐나는 세상이 될 것이다. 오히려 열심히 일하고 능력을 발휘하면서 많은 부(富)를 창출해서 무소유가 아니라 쌓을 곳이 없을 정도로 창고에 가득 채워야 한다.

그래서 불쌍한 이웃과 민족들을 돕고 선 한 일에 쓰도록 해야 한다. 재물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지 결코 속된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행복은 재물이나 명예나 권세를 얻을 때 얻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얻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러나 이것은 지나친 착각이다. 진정한 행복은 얻은 것을 이웃과 함께 나누고 쓸 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돈을 벌 때도 순간적이긴 하지만 행복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돈을 벌어서 금고에 넣어두고, 쓰지 않는다면 무슨 기쁨을 누릴 수 있겠는가. 돈은 벌 때 행복을 느끼는 것이 아니고 쓸 때 더 행복한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혼자 쓸 때보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쓸 데 비로소 더 행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돈을 버는 것보다. 쓰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제가 어려운 시절을 겪은 세대들이다. ‘돈이야 없어서 못 쓰지, 있기만 하면 왜 못쓸까’ 하지만 그것조차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막상 돈을 수북이 쌓아놓았다고 가정해보자. 막상 돈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다고 해도 정작 잘 쓰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10만 원을 100만 원처럼 가치 있게 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0만 원을 10만 원 가치도 못되게 쓰는 사람들도 있다.

요새 우리 사회에서 달라진 것이 있다. 돈 없는 가정에 형제들은 사이가 좋고 어떤 일이 생기면 협력이 잘 이뤄지고 돈을 거둬 부모에게 효도도 잘 한다. 그러나 돈 많은 집 자식들은 형제 간에 협조가 잘 이뤄지지 않고 다투며 우애도 없다.

그래서 부모가 재산을 많이 만들어 놓고 특별한 유언도 없이 죽으면 남은 자식들이 예외 없이 싸우고 소송을 거는 등 철천지원수가 된다. 우리 주위를 보면 평범하게 잘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돈이나 권력이나 명예를 너무 많이 가졌기 때문에 자기를 망친 사람이 수두룩하다.

특히 대기업이나 정치인들의 경우 그 폭이 더욱 심하다. 그래서 재물이 많다는 것이 꼭 축복을 받은 건 아니다. 돈이란 항상 그 돈을 유용하게 쓸 수 있을 만큼만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것은 자신에게 복(福)이 아니라 독(毒)이 되고 재앙이 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돈을 쌓아 놓기 위해 버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번 돈을 잘 쓸 수 있을까 생각하며 버는 돈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번 돈은 자기 돈이 아니고 쓴 돈이 자기 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경은 어리석은 부자에게 “재물을 많이 쌓아 놓고 내 영혼이 평안 하라 하지만 네 생명이 끊어지면 그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그러므로 삶의 풍성함이 재물의 넉넉함에 있지 아니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재물이나 권력과 명예를 언제 어디에 쓸 것인가?” 하는 비전과 꿈을 먼저 세워야 한다. 행복은 소유할 때 얻는 것이 아니라 쓰고 나눌 때 비로소 얻는 것이다.

‘남에게 베풀거든 그 덕(德)에 감격하기를 구하지 말라. 원망만 없다면 이것이 바로 덕이로다.’ 채근담에 나오는 글이다. 베풀었다는 마음까지도 비울 때 비로소 베푼 것이라고 한다. 내가 준 것만큼 좋은 말을 듣고 싶어 하거나, 되돌려 받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쩜 솔직한 심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마음까지도 다 털어버렸을 때가 바로 그것이 진정한 베풂이다. 상대도 부담이 덜 해야 베풂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도움을 받은 사람이 그 은혜를 잊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

간혹 그런 은혜를 받은 사람이 베푼 사람들에게 악담을 하며 상처를 주는 경우를 종종 보아왔기 때문이다. 베푼 사람은 그 마음까지도 다 털어놓아야 하지만 베풂을 받은 사람은 베풂을 기억해 다시 일어서야겠다는 마음가짐과 보답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은 잊지 말아야 한다.

한 생을 살면서 느낀 것은 자기가 베푼 친절과 사랑은 단연코 밑지는 일은 없다. 이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팔월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풍성한 추석이 다가온다.

추석을 맞이하면서 나의 작은 미래를 위해 작은 친절, 한 아름의 소박한 미소, 한 움큼의 포근한 사랑을 투자하자. 남의 마음속에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것처럼 보장된 투자는 없다.

[시인. 칼럼니스트. 前 국민대학교평교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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