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입안에는 치아(齒牙)와 혀(舌)가 있다. 치아는 우리가 먹는 각종 음식물을 소화하기 좋게 짤게 씹어 목구멍으로 넘겨주지만 세치에 혀는 말을 하는 데 쓰인다.

치아가 없으면 소화를 제대로 못 시키듯 혀가 없다면 벙어리가 되거나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말을 할 수 있어도 혀를 잘못 놀리면 자신이 화(禍)를 당하는 것은 물론 남에게 큰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우리 주위에서 혀를 잘못 놀려 화를 당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특히나 국민이 낸 세금으로 한 달에 1000만 원 이상 타 먹는 정치인들 중 상당수가 혀를 바르고, 교양 있게 사용하지 못하거나, 거짓말을 밥 먹듯해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오죽하면 옛말에도 “혀 밑에 날 선 도끼가 있다.”라고 했을까. 작은 혀에 불과하지만, 작은 불씨가 온 산(山)을 태우듯 말 한마디가 살인까지도 일으키며 자신의 행(幸). 불행(不幸)을 좌우한다. 그만큼 한마디의 말이라도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얼마 전 모 방송국에서 여자 아나운서를 대상으로 쌀이 들어있는 병 두 개씩을 나눠주고 한 병에는 좋은 소리를, 또 다른 병에는 나쁜 소리를 매일같이 들려주는 실험을 해본 결과, 좋은 말을 들은 병 속에 쌀은 윤기가 날 정도로 색깔이 깨끗했는데, 나쁜 말을 계속해서 들은 병 속의 쌀에는 곰팡이가 가득 쌓여있는 것을 기사로 확인한 바 있다.

쌀에게도 생명이 있고 어떤 소리를 듣느냐에 따라 감정이 표출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물며 선(善)과 악(惡)을 구분할 줄도 알고 감정이 있는 우리 인간에게는 어떠하겠는가. ‘혀’는 그래서 ‘불’(火) 씨라고 말하고 싶다.

아무리 작은 불씨라도 자칫 큰 불로 번져 대형사고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혀는 남을 저주하거나 독약 같은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반대로 남을 칭찬하거나, 격려하거나, 위로하는 따뜻한 말을 해서 듣는 그 사람이 바르고, 기쁘게, 보람된 삶을 살 수 있도록 좋은 말을 해야 한다.

며칠 전 학교를 들렸다 전철을 타고 돌아오는데 들은 이야기다. 내 옆자리에 차림새가 어수룩하고 장애가 있는 중년의 부부가 앉아 있었다. 전철 안에서 부인이 남편에게 “여보,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아는 게 많아요. 그리고 항상 우리 식구들을 위해 고생하는 거 생각하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남편이 핸드폰을 보면서 환승역과 도착하는 시간까지 말하자 아내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별것이 아닌데도 아내는 남편을 그렇게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남편도 “내 가족인데, 당연히 내가 책임져야지. 아무리 힘들어도 당신과 자식 생각하면 힘이 나고 행복해요. 그리고 이 정도는 다른 사람도 다 알거든요.”하면서 아내의 손을 꼬옥 잡는다.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다워 보이고, 행복해 보였다.

덩달아 마음이 가벼워진다. 문득 내가 알고 있는 지우 한 분이 생각난다. 그 지우 부부는 남들이 다 부러워할 정도의 학식을 갖고 있는 대학교수다.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서 만나는 분들이다.

교회 안에서는 항상 두 분이 밝은 미소를 지으면서 다른 교인들과 좋은 관계를 갖고 있어 가장 모범적인 교우로 부러움을 사는 부부다. 얼마나 말도 상냥하고 친절한지 모른다. 그런데 그분들의 자식 이야기를 들어보면 완전히 반대다.

가정에서는 늘 만나면 부모가 다툰다고 한다. 말도 심하게 해서 듣는 자식들이 민망하다고 할 정도다. 서로가 서로를 무시하는 언사도 거침없이 한다고 했다. 인격을 무시하는 막말을 하면서 가족이 한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지도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외형적으로는 교양 있는 교수 부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자식)는 위선적인 부모가 가증스럽고 부끄럽다고까지 말한다. 그들 부부는 간혹 모임에 참석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도 서로가 상대를 흉보지만 사람들은 모두 농담도 참 잘하고 유모가 풍부한 부부로 알고 있다.

요즘의 부부들 상당수가 그런 부부와 마찬가지로 가식적인 행동과 언어를 쓰면서 자신을 기만하는 삶을 살고 있다. 굳이 성경을 들먹이고 싶지는 않지만 가정의 머리인 남편을 인정하며 존경하고, 또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심같이 인격을 존중하고, 사랑해야 한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 가정이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 서로를 인정하며 좋은 말을 많이 할 때 비로소 존경할 점이 보이고, 소중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일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고 함께 기뻐하며 칭찬의 말을 해주면서 용기를 북돋아주고, 찬사를 덧붙여 주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은 살고자 하는 힘이 생긴다.

반면에 아내나 남편을 혹평하거나 어리석다고 무시하는 말을 하거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아내나 남편의 잘못을 지적하게 되면 자신감을 잃고, 주저앉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더 큰 불행을 자초하게 된다.

‘부드러운 여자’ ‘드러 운 여자’ ‘사랑은 진리입니다’ ‘사랑은 질림입니다.’ ‘님이 남’으로, ‘자살(死)이 살자(生)’로, ‘God(신. 神)이 Dog(개. 犬)’로, 받침이 빠지고, 점이 붙느냐 떨어지느냐에 따라, 단어의 자리가 바뀌면서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처럼 사소한 말 한마디가 기쁨과 힘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좌절과 함께 상처를 주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은 몸에 상처가 나면 피가 흐르고, 딱지가 생기고, 그러다 새 살이 돋아나는 것은 알고 있으면서도 말로 상처를 받으면 그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는다는 것은 모르는 것 같다.

아무리 부부라지만 상처가 미처 아물지도 않았는데 또다시 상처를 주는 말을 하며 가슴속으로 피를 흘리게 한다면 그 가정은 결코 화목한 가정이 될 수 없다. 또 한 분의 지우(知友) 역시 대학교수 출신이다.

지금은 퇴직하고 집에 계신 분인데 아내가 항상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말을 한다며 죽고 싶을 만큼 괴롭다고 호소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그분은 “내가 아내에게 무시당하는 말의 상처로, 여전히 가슴 한구석에 피가 흐르고 있지만 아내와 맞서고 싶은 생각도 없고, 죽고 싶은 맘도 없다. 어차피 서두르지 않아도 죽음은 찾아올 것이고, 또한 모든 것을 자제할 수 있는 지식의 힘이 내게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나의 천성이라고 생각 한다”라며

“1%의 비난의 말보다 99%의 또 다른 칭찬의 말이 있어 내가 이렇게 꿋꿋하게 살 수 있다는 것과 내 주변에는 나를 인정하고 사랑해주는 많은 분들이 있는데 그분들의 위로가 마음의 상처에 치유의 약이 되기 때문에 편안하다”라고 말한다.

아내가 되었든, 남편이 되었든, 울고 있는 그 손을 가만히 잡아주며, 그리고 하찮은 말이라도 끝까지 들어주고, 간혹 고개를 끄덕이며 존중하는 마음을 보여줄 때 오늘 이 시간 누군가가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것, 우리 모두가 알았으면 한다.

좋은 말, 칭찬을 해도 짧기만 한 삶, 어떤 말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우리가 되었으면 한다. 칭찬에 인색한 부부는 되지 말자.

[시인. 칼럼니스트. 前 국민대학교평교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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