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은 광복 70년, 분단 70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지만 3. 1 운동이 일어 난지 96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70이라는 숫자가 갖는 의미 때문일까.

올해 광복절은 유독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광복은 우리 민족이 36년간의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는 축복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비극적인 분단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2차 대전이 끝난 직후 전승국인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38도 선에서 남북으로 갈라놓고 신탁통치로 들어갔으나 미군(美軍)이 우리나라에서 철수한지 5년 뒤 우리는 우리 민족의 최대 비극인 6.25전쟁을 겪어야만 했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군과 전투를 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는 독립투사, 북한군과 싸우는 한국군 등의 영화를 상영하면서 비극의 역사에 대해 국민들을 계몽하는 역할도 했다. 그런 영향으로 일본. 북한 하면 적대감을 갖기도 하는 시대였다.

특히 6. 25전쟁의 비극은 지금까지 많은 영화에서 다룬 내용으로서 그 대표적인 영화는 형제가 남과 북의 서로 다른 편에서 총부리를 겨누고 싸우는 ‘태극기 휘날리며’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독일, 월남 등을 자원해서 노동을 하던 ‘덕수’라는 주인공이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에서 북에 있을지도 모르는 아버지를 애타게 찾는, 미국으로 입양 간 여동생을 영상(映象)으로 만나는 장면 등등 분단의 아픔을 느끼게 하는 ‘국제시장’ 최근 들어서는 ‘무조건 선제공격은 하지 말라’는 교전 지시로 억울하게 참변을 당한 내용이 담긴 ‘연평해전’ 모두가 분단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끼며 눈시울을 적시게 만든 영화다.

그나마 지난 70년을 기억하는 세대가 아직은 남아있기에 각별한 의미를 갖게 하는 것 같다.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어렵사리 경제성장을 이뤘는데 많은 사람들은 분단의 비극과 가난의 설음을 잊고 사는 것 같다.

몇 해 전 ‘KAL기 폭파’에 이어 ‘천안함 피폭’ 때도 ‘연평해전’때도 그랬듯이 이번 8월에도 전방에서 북한군의 소행으로 밝혀진 ‘목함 지뢰’ 도발에 대해서도 일부 시민단체, 정당이 정부를 불신하면서 조작설을 강조하고 여론몰이를 하며 이적행위를 자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광복 70주년 기념식에서도 박 근혜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북한의 ‘목함 지뢰’ 도발에 대해 단호히 대처하되 인도적 교류는 지속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이산가족 명단 연내 교환 등 실체적인 교류 제안을 제사 한 것도 대화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평가된다. 북한은 지뢰 도발로 광복 70주년에 찬물을 끼얹었고, 일본은 진정성 없는 ‘과거형’ 사과 담화로 우리를 실망시켰다.

이날 정부 차원에서의 광복 70주년 행사와는 별도로 광화문에서 청계천까지 일부 시민사회단체와 정의당 등의 회원 7000여 명이 광복절 기념행사를 했는데, 그로 인해 장시간 교통체증의 발생으로 또 다른 많은 시민들이 상당한 불편을 느끼기도 했다.

다행히 큰 마찰 없이 행사가 끝나면서 자진 해산했지만 더 큰 문제는 정의당과 시민단체들이 외치는 구호가 모두 북한에서 주장하는 말과 똑같다는 것이다. ‘미군 철수’ ‘반공법 철폐’ ‘작전권 이양’ 등등. 그런 억지 논리를 주장하는 그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자주국방, 당연히 맞는 말이다. 언젠가는 자주국방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공감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의 여건상 자주국방을 할 여력이 없다. 그러다 보니 작전권 이양도 쉽지 않다.

자존심은 상하겠지만 도전적인 북한을 생각하면 미군이 이 땅에 주둔해야 한다. 또 이 나라는 원천적으로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국가다. 그래서 그들의 활동에 대해 제한할 수 있는 법을 만든 것이다. 그게 반공법이다. 북한과 대체하고 있는 우리는 그 법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반공법’을 폐지하라는 말은 납득이 안 간다. 조국이 어디인지 의구심이 들 정도다. 나라 잃은 슬픔과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반공법과 미국 철수 등을 주장하는 정치권과 시민단체가 안타깝기만 하다.

일례를 들자면 필리핀이나 월남(현 베트남)에서 당시 야당 정치인들과 지식인과 종교인, 학자, 학생들이 미군 철수를 외치며 정부를 성토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위를 벌였다.

그 결과 미군이 철수하자마자 필리핀은 경제 빈국으로, 월남은 이름마저 잊힌 나라가 되어버렸다. 우리나라가 지금 그런 시점에 와 있는 것 같아 미래의 대한민국이 걱정된다. 그들도 후회를 했겠지만 이미 늦은 것이다.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북한은 양의 탈을 쓰고 혀를 날름거리는 늑대다 그들의 도발은 언제나 휴일을 틈타서 일어났다. 정치권과 일부 불순 시민단체들이 나라가 망하거나 흥하는 거에는 상관없이 표 몰이에만 신경 쓰는 이익 집단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다.

새마을 운동을 시작으로 경제대국이 되면서 산업화와 민주화의 모범이었던 대한민국이 자칫 남미 퇴행 국가로 전락할 까 우려된다. 나라가 망할 조짐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잊고 있지만 2015년 8월 15일은 육영수 여사가 북한의 사주를 받은 재일교포 문세광이 쏜 흉탄을 맞고 돌아가신지 40주년이 되는 날이다. 남편이 대통령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격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육영수 여사의 기일을 기억하지 못했고 또 추도식도 조촐하게 치러졌다. 심지어는 자식들인 박 대통령, 박근령, 박지만 세 남매가 하나도 참석치 않았다. 성대하게 치러져야 하는데 쓸쓸한 추도식이 되었다.

이와는 달리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 6주년 추도식에는 전. 현직. 여 야 정치인들의 발길이 줄을 잇는 등 심한 비린내를 풍기는 인상을 주면서 역겨움을 느끼게 했다.

우리 정치문화가 새롭게 되기 위해서는 이미 망자(亡者)가 된 김대중, 노무현의 환상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 그들의 주장대로 신선한 정책이 이루어지려면 세대교체가 무엇보다 필요한 때다.

또한 광복절을 즈음해서 정부에서 태극기 달기 운동을 전개한 것에 대해서도 지적을 하고자 한다. 흔히 어린이날, 어버이 날, 장애인의 날, 등등 일정한 날을 기념일로 정해 각종 행사를 하는데 태극기 게양은 의미가 다르다. 하루 행사로 끝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래전 고(故)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 기억나는데 그 당시 아침저녁으로 관공서는 물론 학교 정부기관 등은 태극기를 게양하고 하강 식을 갖고 모든 국민들은 애국가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가슴에 손을 얹고 경건한 마음으로 있었다.

모든 행사에 앞서 애국가를 부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국기를 향해 경례를 하며, 애국가를 부르며 조국이 있음에 대해 긍지를 느꼈다. ‘반공’이라는 교과서도 있었고 앞서 언급한 바 있지만, 독립군과 일본군이 싸우는, 북한군과 국군이 싸우는 반일, 반공영화를 보면서 반공의식을 강하게 갖게 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북한처럼 반공, 윤리, 역사 교과서가 없어지고, 심지어는 후세에 판단할 수 있는 역사가 정치권에 따라 왜곡된 역사로 변질되고 있다.

정확한 근거와 심의도 없이 정치 바람을 타고 5. 16군사 혁명이 쿠데타로, 5.18 광주 폭동 사건이 민주화 운동으로 바뀌면서 혼란을 자아내고 있다. 아직도 5.18사건은 의혹이 많이 남아있다.

민족의 반역자들이 영웅이 되어 정치인들에게 이용을 당해 억울하게 희생된 시민과 함께 국립묘지에 묻혀있고 또 엄청난 보상금을 받았다. 군. 경(軍警) 희생자들이 받는 보상금은 비교도 안 될 만큼 엄청나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광주사건, 이제라도 진실을 밝혀 반역자들을 색출하고 보상금을 몰수해야 한다. 억울하게 세금을 내는 억울한 국민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옛날 박정희 대통령 시절처럼 국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도 불러야 한다. 그래야 국가(國家)에 대한 애국심이 생길 수 있다.

당연히 그렇게 해서 국가관을 고취시켜야 한다. 휴전 상태에서 북한과 대처하는 우리는 긴장감 조성을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70년 전을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들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는 것이 안쓰럽다.

광복 70주년. 8월 15일은 수많은 선조들이 고귀한 생명을 바친 대가로 맞이하는 날이다. 나라를 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선조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 하고 나라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

이념과 지역, 그리고 세대 간의 갈등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는 대한민국을 지향하고 지켜나가야 한다. 우리가 이 같은 난제들을 어떻게 풀어 가느냐에 따라 또 다른 70년의 성장과 한국의 위상이 달라질 것이다. 나라를 잃은 슬픔을 후손들에게 또다시 물려줄 수는 없지 않은가.

[시인. 칼럼니스트. 前 국민대학교평교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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