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이 사회는 사막같이 매 말라지고 사람들 역시 갈라진 논바닥처럼 매 마른 감정이 된다. 그러면서도 고독을 느낀다.

마치 넓은 바다에서 식수를 갈망하듯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도 혼자라는 외로움을 느끼며 산다. 자신은 상대를 이해하지 않으면서도 남은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도 혼자였지만, 집에 들어설 때도 혼자다. 20여 년 전 지금처럼 전자문화가 발달되기 전에는 유일한 통신수단이 직접 쓰는 편지였다.

그 편지에는 모든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었다. 그러다 전화기가 일반화되면서 사람들은 시간이 걸리는 편지보다는 의사소통이 빠르고 편리한 전화를 선호하게 되었다. 그런 영향으로 우표 판매가 저조해지면서 우체통까지 없어지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말았다.

전화기에 이어 과학의 발달로 선(線)이 없는 무선전화인 핸드폰이 대중화되면서 더욱더 편지를 쓰는 것이 줄어들었다. 그나마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통화 중 감정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는 그 목소리마저도 듣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로 나누는 전화 통화보다 문자로 이어지는 소통을 훨씬 더 선호하면서 목소리가 사라진 것이다. 왜 그럴까. 꼼꼼히 생각해보니 편리함에서 그런 것 같다.

특히 여러 사람에게 의사전달을 할 때 일일이 전화를 하는 것보다 문자가 더 좋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전화 통화의 경우 일단 벨 소리가 울리면 상대가 지금 하고 일을 멈추고 통화를 해야 한다. 전화를 받아도 좋은지, 아닌지를 모른다.

그러나 문자는 상대의 입장과는 상관없이 보낼 수 있고 또 상대는 짬이 나는 시간에 확인하고 답을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상대방의 스케줄이나 시간을 맞추지 않아도 좋다.

또한 문자는 전화통화에 비해 간결하게 요점만 전달하기 쉽고 대화 용건을 해결하는 시간도 단축된다는 이점이 있다. 이런 문자 소통이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인해 더욱 자연스럽고 활발해졌다.

카카오톡, 라인, 밴드, 페이스 북, 트위터 등에서 문자를 주고받으며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인간이 갖고 있던 감성마저 녹아버리면서 삭막해져 가고 있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이 같은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심리적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인터넷만 연결되면 어디에서든 손쉽게 정보를 교환하고 소식을 주고받는 시대가 되었지만 현대인들은 그럴수록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더욱더 힘들어하고 고독감을 느끼면서 과거보다 더 우울감에 빠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자기의 감정을 억제치 못하고 예기치 못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다 보니 언제라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많은 사람들과 접속된 세계로 들어가지만 오히려 혼자라는 외로움을 더 느끼게 된다.

특히 젊은이들의 경우 모여서 몸을 부대끼며 대화를 하고 노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공간에서 스마트폰으로 각자의 문자에 몰두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으면서도 생각은 따로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또 다른 환경에서도 어떤 모임이나 회의를 하는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지루하게 여겨지면 살며시 핸드폰을 꺼내들고 메시지를 전송하거나 게임을 하면서 히죽 히죽 웃기도 한다.

필자가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도 일부 학생들이 수업을 들을 생각은 하지 않고 뒷좌석에서 핸드폰을 꺼내놓고 게임 등을 하면서 미친 사람처럼 웃기도 한다. 호명을 해도 듣지 못할 정도로 깊게 빠져있는 경우도 있다.

문제는 글인 문자로 의사가 전달되다 보니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똑같은 단어라도 감정이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라는 문자를 보고는 좋은 의미로 한 것인지 불쾌한 것인지를 알 수가 없다.

받아들이는 상대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언어로 의사를 전달할 경우에는 실제 대화를 통해 상처를 주는 말인지, 아닌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가 있지만 스마트폰을 통해 전달되는 문자 소통은 상대의 감정을 읽을 수가 없어 상대가 어떤 마음에서 보냈는지를 알 수가 없다.

감정이 온전하게 전달되지 못하다 보니 사람과의 깊은 교류관계가 결여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하루에도 많게는 수십 번씩 접속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보낸 메시지를 체크하거나 남들이 무슨 글을 올렸나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카톡 같은 곳을 계속에서 접속하다 보면 잠시라도 스마트폰을 안 보면 매우 궁금해하고 심지어는 불안해지기까지 한다.

혼자 조용히 있지 못하고 자꾸 스마트 폰을 의식하게 되고 의존하려고 한다. 그렇게 되다 보니 사람들하고 어울리기를 싫어하게 되면서 외로움까지 증폭된다.

사람은 예로부터 집단 사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하는 고등 동물이다. 옛말에도 사람과 가까워지려면 식사를 하고, 더 가까워지려면 목욕을 하라는 말이 있다. 서로가 부딪치고 어우러지면서 상생상극의 화학반응이 일어나면서 서로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로 인해 사람들이 그런 불편함과 수고스러움을 감수하기보다는 일시적으로 편한 스마트폰을 찾으면서 마른 논바닥처럼 감정이 메말라지고 갈라지면서 흉흉한 사회로 변하고 있다. 불현 듯 ‘퇴화’란 단어가 생각나면서 두려움이 앞선다.

이렇게 순간의 편리함에 빠져 문자 소통을 계속할 경우 자칫 언어를 잃는 때가 오지는 않을까 우려된다. 사용하지 않으면서 퇴화가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이제는 인터넷의 발달로 글도 쓰지 않는다.

그런 영향으로 인해 요즘 세대들은 글자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갈지 자’로 쓴다. 한 문장을 만들어도 5060세대는 사전을 찾아가면서 작성했기 때문에 쉽게 잊지를 않는다.

그러나 요즘 세대는 인터넷에 들어가 붙이기만 잘 하면 짧은 시간에 아주 좋은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아쉽게도 그렇게 쉽게 붙이기로 하다 보니 노인층보다 기억력이 더 떨어진다. 앞날이 걱정되는 부분이다. 비단 우려되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TV 같은 경우도 칼라로 방영되는 그 강한 색색의 찬란한 빛이 그대로 화면 밖으로 흘러나오면서 사람들의 시력을 저하시키고 있다. 미국이나 유럽과는 달리 좁은 주택에서 그 화면을 바라보니 시력이 떨어져 안경을 착용하는 많은 어린이와 젊은이들이 늘고 있는 추세다.

또 스마트폰에 이어폰을 귀에 꽂고 고음(高音) 음악을 듣다 보니 청력이 망가지기도 하지만 뇌까지 손상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젊은이들이 작은 소리를 못 듣고 큰소리로 말해야 들을 정도의 청각기능이 마비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현상이 지속된다면 미래에는 모두가 안경을 착용하고, 또 보청기를 끼고 있는 세상이 될까 봐 두려운 생각이 든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스마트폰만을 지속적으로 이용한다면 자연적으로 폐쇄적 이기주의자로 전락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현대인들이 느끼고 있는 고독과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이제부터라도 스마트폰의 노예에서 벗어나 얼굴을 마주하며 서로의 생기를 확인하고 목소리를 통해 감정이 전달되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보자.

더불어 스마트폰 없이 혼자 사색을 하는 기술도 연마하자. 문자 소통을 했던 많은 이들과도 문자가 아닌 전화 목소리 소통으로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는 기회를 만들어보자. 가끔은 스마트폰이 없어도 불안해하지 않고 혼자서도 사색을 즐길 수 있는 우리가 되어 보자.

그래서 사람의 소리가 요란하게 나며 모든 사물이 보이고, 듣기고,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고독하지 않는 그런 건강한 세상을 만들어보자.

[시인. 칼럼니스트. 前 국민대학교평교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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