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의 아내 황 씨는 재능이 매우 뛰어나고 됨됨이가 훌륭해 남편이 승상의 자리에 오르는데 있어 내조의 역할을 잘 한 것으로 유명하다. 제갈량은 아내의 간곡한 부탁으로 늘 부채를 들고 다녔다.

현명한 아내인 황 씨가 제갈량이 부채를 갖고 다니게 한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절대로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말고 삭이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아내는 제갈량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유비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표정이 매우 밝았지요. 그러나 조조에 대해 말을 할 땐 미간을 잔뜩 찌푸리는 것을 보았고, 손권을 말할 때는 수심에 찬 모습을 보였지요. 큰일을 도모하려면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침착해야 합니다. 이 부채로 늘 얼굴을 가려서 보이지 마세요.”

아내 황 씨가 말한 얼굴을 가리라는 것은 침착하라는 의미로 풀이된다. 황 씨는 마음이 고요해야 태연함과 이상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가만히 요즘 돌아가는 모양새를 보면 제갈량의 부채가 필요한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욱” 하는 성질에 순간을 참지 못해 일어나는 숱한 사건들을 눈만 뜨면 쉽게 보고 듣게 된다. 새삼 제갈량의 아내 황 씨의 지혜가 그 어느 때보다 더 필요한 때인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특히 정치권을 반추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교훈이 말(言語)의 품위다.

정권을 둘러싼 갈등이 반목과 증오로 확대되면서 일부에서는 말이 저주의 비수(匕首)가 되어 돼 꽂히기도 한다. 지난 이야기지만 야당의 한 의원은 박근혜 대통령을 가리켜 ‘귀태’ (鬼胎)-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사람) 의 후손이라 했다.

거기다 한 술 더 떠 같은 당의 또 다른 한 의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10. 26피살을 언급하면서 딸이 같은 전철을 밟을 수 있다고 악담을 했다. 비단 이 뿐만 아니다. 일부 여야 의원들은 신성해야 할 국회의사당 안에서 누구라 가릴 것 없이 비속어와 막말을 섞어가며 핏대를 올리곤 한다.

심할 때는 폭력을 휘두르기도 했다. 더구나 국정감사라도 할라치면 일부 의원들이 피감 기관장을 상대로 ‘언어의 갑(甲) 질의 수렁에 깊이 빠져들곤 했다. 굳이 외국의 예를 들자면 상대방의 인격을 모독하고 의원의 품위를 손상 시키는 언어 행위는 엄격한 제재를 받는다.

미국의 경우 야당인 공화당 조 윌슨 하원의원이 의회 연설 중인 오바마 대통령을 향해 “거짓말 마(You lie)” 라고 외쳤을 뿐인데, 미 의회 역사상 처음으로 비난 결의안을 채택해 그의 무례를 질타했다. 윌슨은 용서를 구하느라 바빴다.

표현의 자유를 내세우며 막말을 일삼으며 뻔뻔한 모습을 하는 우리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라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신문에 칼럼을 쓰다 보면 싫은 소리도 듣고 또 비난을 받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처음에는 그런 비난을 받게 되면 글을 쓰는데 신경이 쓰이고 상심까지도 한다.

그러나 회를 거듭할수록 점차 태연해지고, 비판은 오히려 글을 쓰는 사람을 격려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오래전 한약분쟁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다. 신문사에 한 독자가 내 기사에 항의를 하는 전화를 했는데, 반말에 입에 담을 수 없을 만큼의 욕까지 한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인데 그렇게 욕을 하시면 되겠느냐?”고 했더니 당장 쫓아오겠다며 꼼짝 말라고 하면서 전화를 끊는다. 한 시간 후쯤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중년의 남자, 직감적으로 전화를 한 주인공임을 느꼈다.

대뜸 내게 “야, 이 개새끼야” “이런 개새끼를 보았나?” 말끝마다 개새끼다. 그럴 때마다 나는 ‘멍멍’ 하고 개 짖는 소리를 냈다. 편집국의 모든 사람들은 이 같은 상황에 대해 일손을 놓고 예의 주시하고 있다. 어림잡아 몇 십 분이 흘렀을 때다.

그 독자가 어느 정도 감정이 누그러졌는지 “아니 기자 양반 어떻게 해서 내가 개새끼라고 욕을 하는데도 화를 내지 않고 개소리만 내는 거요.” 그때 난 그 독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선생 눈에 내가 개로 보였으니 개소리를 낼 수밖에요.”

그 후 우리는 친구가 되었고, 또 그분은 내 시집(詩集)까지도 내주었다. 사업에 실패하고 부산으로 이사를 간 후 서울에서 한 번 본 이후 지금까지 소식을 모르고 있다. 얼마 전 또 그와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간사’로 있는 모 대학 동문회 분과 위원회 위원장이 새로 선출되었다. 위원들이 뽑은 게 아니라 외부 추천으로 위원장이 된 분이다.

검사 출신인 신임 위원장은 “위원장이 젊은 사람이 되었으니 간사도 젊은 사람으로 바꾸겠다. 현재 간사는 여러 곳에 칼럼을 쓰면서 학교를 힘들게 하고 있어서 직분을 줄 수 없다는 게 동문회 입장이다. 그래서 간사가 될 수 없다.”

그런 발언을 두고 즉시 위원들이 ‘설령 동문회에서 그런 말을 했어도 공개석상에서 개인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말을 한 것은 잘못’이라며 사과를 하라고 했다. 물론 젊은 위원장이 선출되었으니 간사도 젊은 사람이 하는 게 좋다.

그러나 꼭 젊은 사람들이 하는 게 능사는 아니다.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위원들 절대다수가 65세가 넘은 분들이다. 그런 분들을 아무리 동문이라고 하지만 젊은 사람들이 이끌어 갈 수 있을까? 아니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비슷한 연배가 있어야 쌍방 조화를 이룰 수가 있다.

‘겉절이’와 ‘신 김치’를 예로 들어보고자 한다. 갖은 양념이 들어간 겉절이는 싱싱하고 감칠맛이 난다. 그러나 그런 맛을 내는 겉절이로 김치찌개를 만들 수는 없다. 제맛을 내려면 다소 쉬기는 했지만 신 김치를 넣고 끓여야 김치찌개 맛이 나는 것이다.

나름대로 자기의 역할과 맛을 낸다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젊은이는 젊은이대로, 나이 먹은 사람은 나이 먹은 사람대로 다 제 역할이 있고, 또 그렇게 어우러져야 조화를 이루고 조직이 잘 되는 것이다.

이 같은 발설에 대해 총동문회에 확인을 한 결과, 동문회에서는 누가 그런 비상식적인 말을 함부로 하겠느냐며 오히려 어이없어하는 모습이다. 분명 한 쪽에서는 동문회에서 그런 발언을 했다고 하는데, 동문회에서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어느 한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정치판도 아닌데 어떻게 검사 출신이, 민권 변호사를 자처하는 분이 그런 말을 함부로 하는지, 그의 인격이나 사상이 의심스러울 정도다.

내 칼럼에 대해 비난을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좋아하고 격려의 문자까지 보내며 밥도 사시는 분들도 생각보다 많다. 그래서 힘이 나기도 한다. 심지어는 진보를 자처하는 분들 중에도 내 글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논리적으로 잘 쓰고 있다는 말도 한다.

일부 위원들이 한 사람의 명예를 훼손시키고, 인격을 모독하는 발언을 한 신임 위원장을 그대로 두어야 하겠냐고 반문하는 분들도 있지만 일단은 위원장을 인정하고 싶다. 사건을 크게 확대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또한 총동문회에서 진위를 확인한다고 하니 사태를 주시할 뿐이다. 법정 스님은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써 놓은 책까지도 ‘말의 빚’이라고 했다. 변호사가 말이 많은 것 인정하지만 그래도 말은 가려서 해야 한다.

스님에 비하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혀의 파산선고’를 받아야 마땅하다. 제갈량처럼 갖고 다니는 부채는 없지만,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침착하려고 한다. 마음이 고요해야 의연함과 이성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배려하는 마음이 되고자 한다.

양보하고 배려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지만 배려야말로 인간관계를 원만하고 매끄럽게 이끌어 주는 윤활유가 될 수 있다. 배려는 타인의 마음을 열게 하는 열쇠다.

또한 남을 생각할 줄 아는 마음도 인격자가 갖추어야 할 미덕 중의 미덕이라 할 수 있다. 늙고, 젊음을 떠나 이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은 가식이나, 덕행이 아니라 예의범절일 것이다. 배려도 하나의 예의다.

[시인. 칼럼니스트. 前 국민대학교평교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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