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 때 쯤 이면 연례행사처럼 치러지는 행사가 있다. 그들을 만날 때마다 지나 온 삶을 되돌아보며 아주 작은 보람을 느낀다. 대접을 잘 받아서가 아니다. 그들로부터 좋은 관계로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이 뿌듯한 것이다.

우연한 일치일까 2~3월이 되면 과거 함께 했던 후배기자들을 만나게 된다. 보건복지부출입기자, 같은 직장언론사에 있던 기자들, 또 종교계 기자들, 어림잡아 3~4팀의 후배기자들이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리를 마련하고 초청을 한다. 당시의 무용담도 귀를 즐겁게 하지만 더욱 더 내 귀를 즐겁게 하고,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것은 하나 같이 공통된 그들의 말이다.

“선배는 지장(智將).용장(勇將).덕장(德將)중에 덕장입니다. 우리 후배들에게 덕을 베풀었습니다.” “선배는 우리들을 잘 챙겨주시고 늘 관심을 갖고 대해 주셨습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자존심 강한 후배 기자들이 선배 대우를 깍듯이 하는 것을 보면서 그래도 세상을 헛살지는 않았구나 하는 오만한 생각이 든다.

인간관계를 잘 해나갔다는 자부심까지 든다. ‘주변사람들에게 덕을 많이 베푸는 사람은 위기가 닥치고 힘든 순간이 와도 주변에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어 외롭지 않다’는 뜻을 가진 논어에 나오는 ‘덕불고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라는 글을 내 명함 위에 적어 놓았다. 인간관계를 생각한 것이다. 명함을 받아보는 많은 사람들이 명함을 받으면서 꼭 하는 말이 있다. “참 좋은 글이네요”

이 세상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공동조직의 사회다. 그러므로 인생의 중심에는 반드시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 인간관계는 폭넓고 다양 할수록 좋다. 사람과의 만남도, 사랑도, 인간관계의 연습이라 할 수 있다. 만남과 사랑에 있어 망설이는 것은 그 결과를 미리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 사람과 만남의 관계를 맺으면서 경험을 쌓는 것이다.

흔히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Give & Take' 라는 말을 우스갯소리로 쉽게 말한다. 그게 안타깝다. 왜 ‘Give' 가 'Take' 보다 먼저 나오는가를 깊이 생각해보았다. 많은 사람들, 대다수가 받은 대가에 대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논리로 따지자면 결코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주는 것‘ 보다 ’받는 것‘ 을 먼저 생각하게 되었는가를 꼼꼼히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대가를 생각하지 말고 멀리 내다보고 먼저 베푸는 자세가 되었다면 우리의 인간관계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런 관계가 형성 될 때 우리 사회는 밝은 사회가 될 것이 분명하다. 사랑 역시도 그렇다. 어머니가 조건 없이 자식에게 무조건 베푸는 헌신적인 사랑을 아무도 이길 수 없듯, 사람과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다. 사랑이 눈물이 되고, 미움이 되고, 원한이 되는 이유는 강 건너 불을 보듯 뻔하다.

어머니 같이 ’주기만하는 사랑‘이 아니라 내가 준만큼은 되돌려 받으려는 보상의식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준만큼을 받으려다보니, 본전을 찾겠다는 생각이 앞서다보니, 사랑이 눈물의 씨앗이 되고, 끝내는 미움의 씨앗으로 변해 서로 간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이 같이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삶의 그림자가 우리 내면에 항상 깊이 숨어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기적인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을 나쁘다고 속단 할 수는 없다.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에 따라 삶의 패턴은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좋은 인간관계를 갖기 위해서는 말을 하는 입을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왜 하나의 입과 두 개의 귀를 우리에게 주셨을까 ?’ 철학자 제노가 궁금해 하던 말이다. 이는 말하기보다 듣기를 ‘배’로 하라는 메시지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려운 문제에 부딪쳤을 때 그 답을 몰라서 고민하기보다 해답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자신이 고민스러울 때가 많다. 그래서 내 고민을 들어주고 공감해 줄 그 누군가를 찾게 된다. 작금의 정치권을 보아도 그렇다. 그 어느 누구도 민생의 진한 아픔을 헤아려 들어주는 정치인들이 전무하다시피하다.

저마다 자신만의 논리로, 막말을 하고, 심지어는 국가원수에게 비난의 화살을 쏟아내며 명분 찾기에 급급했을 뿐, 그 어느 한마디도 국민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입을 열어 막말을 하는 대신 귀를 열어 민생의 소리를 들었더라면 국민들에게 더 좋은 모습을 보였을 것이다.

혹시 내가 정치인 같은 사람은 아닌지 내 모습에 잠시라도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가져보았으면 한다. 귀를 기울이는 것은 곧 관심을 갖는 것이라 생각된다. 관심은 곧 사랑이다. 사랑은 곧 섬김의 마음이다. 상대방을 사랑하고 섬기려는 마음 없이는 절대로 두 귀를 열수 없다. 귀를 열기에 앞서 먼저 내 마음을 상대에게 열어야 한다.

이 세상에 도(道)를 얻기 힘든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모른다는 생각에 푹 빠진 사람이라고 한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의 공통점은 ‘들을 귀’ 가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수돗가에서 물을 받으려 하는데 그릇을 거꾸로 들고 있다면 하루 종일 그릇을 들고 서있어도 한 방울의 물도 받을 수 없다. 듣는 귀가 없다면 바른 인간관계를 제대로 유지 할 수 없다. 우리는 즐거움(락,樂)과 괴로움(고,苦)속에서 오락가락하는 하루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언제나 즐겁게만 살 수 없고, 또 언제나 고통 속에서 살지는 않는다. 아무리 절대자에게 기도를 한다 해도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착각이다. 다만 현실을 인정하고 승복 할 때 비로소 베풀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주니까. 받아야 한다.’ 는 것에 연연하지 말고 어머니의 마음처럼 조건 없이 나누고, 베풂에 대해 감사하는 그런 사람, 이웃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되어보자.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해야 한다.

[시인. 칼럼니스트. 前 국민대학교평교원 교수]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메디팜스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