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우리는 민족명절인 설을 맞이했다. 민족대이동을 하는 이맘때가 되면 고향을 찾은 사람들이 서로 세배를 하며 ‘복 많이 받으세요.’ 라고 덕담을 나눈다. 이 같은 덕담은 주로 건강, 물질, 권력, 명예 같은 구체적인 것들을 많이 누리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말이다.

그런 덕담이 한 때는 ‘건강하세요’ 라는 말로 덕담을 나눈 적도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복은 사뭇 의미가 다르다. ‘소유의 복이 아니라 존재의 복’이라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복 이전에 복 받을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흔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과 기독교의 축복은 다르다. 일반인이 말하는 행복(happiness)은 ‘우연히 일어나다’(happen)에서 유래된 말이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축복(blessing)은 '피를 흘리다’(bleed)라는 원어에서 나왔다.

따라서 축복은 우연히 주어지는 게 아니라 이미 대가가 지불된 것이다. 축복을 원하면서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요행을 바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는 우리가 복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로부터 주어지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런 사고로 누군가로부터 주어지는 복을 바라고 빌면서 기대감으로 산다.

그러나 복이란 돌아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스스로 베푼 만큼 돌아오는 것이다. 따라서 복을 많이 받기 위해서는 그만큼 복을 많이 베풀어서 그 베풂이 흘러 넘쳐서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까지 복의 근원이 되기를 빌어야 한다. 그 같은 베풂은 부(富)의 역동적 선순환을 제공하는 것이다. 베풂만큼 유익이 다시 돌아오기 때문이다.

비록 그 돌아옴이 물질 자체가 아니더라도 베푼 이의 마음에 깃드는 정신적인 여유로움과 영적인 상쾌함은 물질로도 환산 할 수 없는 축복이다. 이런 베푼 자의 행복감은 그의 삶에 공간을 은혜가 넘치는 정원(庭園)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제는 행복한 투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참 된 평안은 자신의 소유욕을 버리고 영원한 것을 얻기위해 순간적인 이익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후회 없는 삶, 좋은 것의 소중함은 지금 대가를 치르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감사의 마음은 풍성함이 아닌 배고픔과 불편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생각과 재물 욕, 명예욕을 버리고 남의 덕에 산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감사함의 마음이 될 수 있다.

항상 남을 먼저 배려하고 고마운 일부터 찾아내신 감사의 마음. 날마다 새로운 삶을 가슴속에 되새기며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행복합니다’ 라는 마음으로 사는 이 땅의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좋은 것을 깊이 느끼려면, 감사를 진짜로 경험하려면, 눈물로 내려놓음의 불편함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라도 절망 할 수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절망을 두려워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 절망이야말로 희망이라는 축복을 얻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기 때문이다. 고달픈 인생을 살면서 우리는 수 없이 절망을 하며 산다. 그래서 슬퍼하고 낙심하며 심지어는 자포자기하면서 자살을 생각하기도 하고 끝내는 자살까지도 하는 아주 불행한 삶을 마감하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절망은 희망의 어머니요 희망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절망은 주변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또 다른 지혜이자 삶의 목포를 주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축복이다. 우리 마음은 수천 개의 채널이 있는 텔레비전과 같다. 그래서 내가 선택하는 채널대로 순간순간의 내가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채널의 선택을 어디로 돌리느냐에 따라 분노의 마음이 되기도 하고, 내 마음이 뜨겁게 되고 기쁨의 마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부러라도 미소를 지면 더 행복감을 느끼게 되고 슬픈 표정을 지으면 더욱 슬퍼진다.’ 는 말처럼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분노와 기쁨도 마치 어떤 채널로 고정 시키느냐에 따라 미소를 짓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는 것이다.

똑같은 오늘 하루인데 사람들은 특별한 날만 되면 빈자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나눔의 삶을 산다.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인생들에게는 완전한 행복은 없다. 다만 행복할 수 있는 조건과 재료들, 그리고 그 씨앗이 주위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씨앗을 잘 가꾸고 키워서 행복을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따라서 행복은 완제품이 아니라 수제품이다. 스펙이 좋다고, 돈이 많다고, 공부를 많이 하고, 장학생이었다고,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목표를 향해 노력하며, 성실하게 가꾸어야만 거둘 수 있는 삶의 열매가 행복이다.

그러므로 지금 처해있는 곳과 상황에서 가진 것을 소중히 가꾸어야 한다. 참된 행복은 바로 거기에서 아름답고 향기가 있는 사랑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행복의 씨앗들, 주신 것을 감사하며 잘 가꾸어 행복한 삶의 꽃을 피워야 한다.

경기침체와 추잡한 정치권의 행태, 그리고 고향 길의 교통체증, 50년 북한이 남침을 감행하면서 일어 난 비극. 고향을 가고 싶어도, 가족들을 보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실향민들, 고향을 잃고, 가족을 잃은 실향민들이 어림잡아 5만 여명, 그 중에서도 매년 4000여 명이 한(恨)을 품고 이 세상을 하직하고 있다.

그런 것을 감안하면 언제라도 찾아갈 수 있는 고향이 있고 또 언제라도 친지와 가족을 만날 수 있는 우리가 얼마나 행복하다는 것을 알아야하고 감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행복해하고 감사해야 할 일은 또 있다.

비록 생활이 어렵고 고통스럽다 해도 살아있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눈과 어디에라도 갈 수 있는 손과 발. 그리고 소화를 시킬 수 있는 육신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부모님이 귀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모든 삶에 대해 만족이 있는 사람 또한 행복한 사람이다. 세상을 믿고 좋은 말만 전하며 성실함으로 일을 좋아하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좋은 생각만 하고, 가족과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 이웃을 위해 베풀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진정 행복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인생을 살면서 누구와 비교할 때 불행이 생긴다.

세상 사람들의 지문이 모두 다르듯, 삶 또한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꽃의 색깔과 향기가 다르듯 인생을 살아가는 모양 또한 다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람에 따라서 좋아하는 꽃도 다르다. 5월의 붉은 장미를 좋아하는 사람, 가을의 코스모스를 좋아하는 사람, 이름조차 없는 들꽃을 좋아하는 사람, 모두가 좋아하는 게 다르다.

그래서 어느 꽃이 제일 아름답고 최고라고 말 할 수 없듯이 우리의 행복이라는 기준에 대한 정답은 없다. 불행을 느끼지 않을 때 그 때가 바로 행복한 때이고 감사 할 때다. “저는 하나님이 쓰시던 아주 작은 몽당연필 입니다. 깎아서 쓰는 몽당연필입니다.” 테레사수녀의 그 짧은 말 한마디가 너무나도 큰 감동을 안겨 준다.

진정으로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은 한 사람의 부와 명예가 아니라 그 사람이 오랜 시간 흘렸던 땀과 눈물의 아름다움이다. 아무래도 올 을미년 새해부터는 ‘복을 많이 나누시고 건강하세요.’ 라는 인사말로 바꿔야 할 것 같다.

[시인.칼럼니스트.국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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