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로부터 나를 공격하는 말을 듣게 될 경우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그 상처의 말이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 혹은 동료로부터 나왔건, 아니면 전혀 생면부지의 사람으로부터 나왔건,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마음을 찢어지게 하는 것은 똑같은 느낌을 갖는다.

미움이 담긴 공격적 말을 처음 들었을 때의 충격은 자칫 마음의 평정을 한 순간에 깨트리고 때론 분노와 슬픔, 자책의 늪에 깊이 빠져들게 만든다. 상처의 말을 하는 그런 사람을 안 보면 그만이겠지만 가족이거나 자주 접하는 사람들과는 그것도 쉽지 않다.

설령 그 사람을 보지 않고 피한다 해도 한 번 들은 상처의 말은 쉽사리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공격적인 말로 인해 상처를 받았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지혜롭게 처신하고 그래서 다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있을까? 어떻게 해야 내 자신을 파괴 하게 만드는 미움, 그 미움을 키우는 대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부분에서 굳이 참아야 한다는 조언은 하고 싶지 않다. 참을 인(認). ‘세 번 참으면 살인도 면한다.’ 는 옛 말도 있기는 하지만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조건 참기만 하면 그 아픈 상처가 마음속에 그대로 쌓일 뿐이다. 그래서 감정을 억지로 억누르다보면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이면서 ‘화병’(禍病)이 생겨 건강을 악화 시킬 수 있다. 그러나 간단한 해결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상대를 ‘이해’를 하는 것이다.

왜 상대가 저렇게 밖에 말을 하지 못하는 지를 깊이 생각해보는 것이다. ‘그럴 수가 있어?’ 라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었겠지!’ 라고 마음가짐을 갖는다면 스트레스도 쌓이지 않고 마음도 편안해질 수도 있다. 상처의 말에 대한 응급처치라고 할 수도 있다. 여기서 한 가지를 집고 넘어 갈 것이 있다.

상대가 내게 화를 내고 상처가 되는 막말을 하는 것은 상대의 자유라 하지만 그것에 대해 내가 어떻게 반응을 하느냐 하는 것 또한 나의 자유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반응에 대한 나의 선택의 자유를 잊고 산다. 그러다보니 무의식 적으로 화를 화로써, 미움을 미움으로써, 맞대응하기 때문에 문제가 확대되고 서로의 상처는 오래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처럼 힘들어 하는 것은 상대의 탓도 있겠지만 또 다른 이유는 내 안에서 키우고 있는 상대를 향한 미움 때문이다. 그 미움에서 비롯된 자기 방어용 이유들이 마음속에서 쳇바퀴 돌듯 계속 맴돌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그 틀 안에 가둔 채 말의 상처로부터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 는 옛 속담이 있다. 이는 말로 말미암아 어떤 일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니까 항상 말을 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는 뜻이다. 말을 조심하지 않고 함부로 내 뱉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종종보게 된다. 특히 정치인들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 화근이 되어 인격에 손상을 입는 것은 물론 가족들에게까지도(부끄러운)상처를 안겨주며 자신의 입지마저 잃어버리기도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몇 년 전 대통령 선거유세 기간에 어떤 대선 후보가 노인들에 대한 비하발언을 해 곤욕을 치룬 적이 있다. 결국 여론에 눌려 사과를 하는 헤프닝이 있었는 가하면 또 어떤 국회의원은 여성비하적 발언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던 것을 기억 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도 노인비하 발언을 한 모 야당중진의원이 사과는 커녕 자기를 합리화하려는 비열하고 뻔뻔한 모습을 보였고, 영웅 심리에서 상대를 비난하는 말을 거침없이 내 뱉어 비난을 받는 정치인들이 있다. 모두가 말을 함부로 내 뱉으면서 일어나는 일이다. ‘있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아직도 이 땅에는 많다’는 데 슬픈 마음이 든다.

굳이 성경을 인용하지 않아도 말이나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에 따른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을 알았으면 한다. 그런 결과에도 불구하고 특히 정치인들은 부적절한 말을 함부로 내 뱉으며 자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상처의 아픔을 안겨주고 있다. 권력의 타락은 말을 오염시키고, 오염된 말들은 다시 정치의 타락을 부추긴다.

오웰의 “1984” 가 그린 세계다. 한국 정치가 막말들의 잔치를 벌어진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이 땅의 정치인들이 아예 국민들과 소통의 문을 닫은 채 ‘인기 성’ 막말을 함부로 하면서 상대가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아랑곳없이 혈세만 받아 챙기면서 공짜로 정치를 하고 있다. 억울하고 분한 생각마저 든다.

문득 ‘갑 질의 갑 질’ 행세를 하며 목이 뻣뻣한 정치인들을 보면서 지난 가을 김장을 할 때가 생각났다. 마트에서 막 사온 뻣뻣했던 배추를 소금물에 절여두었더니 하루 만에 풀이 죽어 있었다. 기세등등하던 그런 배추들이 하나 같이 뻣뻣했던 잎사귀를 고집하지 않고 순순히 현실을 받아드렸다.

배추는 양념을 받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몸에서 물기부터 뺀 것이다. 절인 배추를 다른 통으로 옮기면서 생각나는 게 있었다. 정치인들이다. 정치인들이 왜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지만, 정치인들이 김장 배추를 닮았다면 이 나라의 정치는 어떻게 되었을까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또 배추에 양념을 넣으면서도 생각해보았다.

‘여당’ 과 ‘야당’ ‘보수’와 ‘진보’는 왜 상대를 무조건 미워하며 헐뜯고, 상처투성이인 막 말을 함부로 내뱉으면서 싫어할까. 심지어는 아주 원수처럼 대할까. 우리는 불행하게도 일제식민지와 한국 전쟁, 그리고 현대사를 거치며 좌우 진영이 대립을 하면서 서로 간에 상처를 주고받았다.

안타깝게도 그런 관계에서 지금까지도 상처와 분노를 잊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아무는 걸 싫어하는 것처럼 미움으로 가득 찼다. 배추와 양념의 관계는 필연적이다. 절인 배추에 양념을 넣고 일정 기간을 지나 발효되고 숙성되면 완전한 맛을 내는 김치가 된다. 양념이 없으면 배추가 김치로 될 수 없다. 또한 배추가 없는 양념만으로는 김치를 만들 수 없다.

뻣뻣했던 배추가 절여지고, 양념을 만나면서 김치가 되듯 정치판도 그런 김장 김치의 맛을 우리 국민에게 보여주었으면 한다. 자신을 죽인 후, 양념을 넣고 숙성기간을 거쳐 만들어지는 김장 김치처럼, 여야, 보수 진보가 어우러져 국민들 입맛에 맞는 좋은 정치를 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렇게 될 경우 아귀다툼으로 싸우며 상대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 아닌가. 절인 배추를 언급했지만 배추를 절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소금이 필요하다. 물론 소금은 음식 맛을 낼 때 필요한 양념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사람들이 하는 말에 소금을 쳐서 맛을 내면 어떨까 한다면 이상 한 생각을 하는 것일까.

소금에 절이면 뻣뻣했던 배추가 풀이 죽어 부드러워지듯 뻣뻣한 자세에서 거친 말을 서슴지 않는 정치인들의 말을 부드럽게 하기위해서도 그 혀에 소금을 쳤으면 한다. 소금은 맛 외에도 썩지 않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썩은 말이 나오지 않게 해야 한다.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는 마음을 아프게 하고 교만한 말도 있지만 썩게 하는 말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혀에 소금을 쳐서 썩지 않는 말을 하게 해야 한다. 앞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대응하기에 앞서 상대를 이해하는 마음을 갖도록 하자. 상대를 이해하려고 할 때 비로소 내 마음 속 미움의 불길은 줄어들 것이다. 살다보면 정말로 내가 잘못해서 싫은 소리를 듣거나 비난의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무조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기보다는 잠시라도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자. 내가 잘못한 것을 알았다면 바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자. 만나서도 내 변명을 하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상대가 나로 인해 아파했을 그 마음을 보듬어주자.

그러나 끝까지 나를 미워하고 상처가 담긴 말을 하는 사람에게는 그를 위한 기도를 하자. 그가 행복해지기를, 그가 세상의 아픔으로부터 치유를 받도록, 그의 마음이 평온해져 언젠가는 웃으면서 만나기를 바라는, 이런 기도는 결국 내 마음속에서 만들어내는 미움과 상처로부터 나를 보호해 안정을 되찾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사회 또한 건전하고 밝고 맑은 사회가 될 것이다. 필요한 말을 때에 맞춰 해야 지혜 있는 자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 할 것을 알리라.” 성경 말씀이다.

[시인.칼럼니스트.국민대학교 교수]

※ 이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저작권자 © 메디팜스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