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낮은 짧고 날씨는 세상인심만큼이나 매섭게 차다. 거리마저 한적하다. 아직은 구정 설이 남아있긴 하지만 곧 봄이 오리라는 생각에 마음이 좀 따뜻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삶의 근원인 아침 햇살이 떠오르는 날, 아침을 맞이하는 것처럼 즐겁고 행복한 오늘. 그런 ‘오늘’. 문득 80년을 한 사람과 같이 살고 있다면 지금은 어떤 느낌을 갖고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것도 80년을 한 결 같이 변치 않고 서로를 사랑 하고 있을까?

2015년 1월 22일은 필자가 생면부지의 한 여자를 만나 결혼 한 지 35주년(산호혼식: 珊瑚婚式)이 되는 날이다. 이맘때만 되면 22일을 전후(前後)로 일주일은 결혼시계를 찬다. 물론 아내가 선물한 예물이다. 그런 여유로 필자는 아내에게 그때를 감사하며 그 날을 기억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아내가 알던 모르던 한 주간은 결혼시계를 차는 것이 연례행사가 되었다.

며칠 전 76년을 함께 살아온 노부부의 사랑이야기, 독립영화로는 이례적으로 관객 100만명선을 넘어서며 아직까지도 인기리에 흥행중인 다큐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를 은퇴목사님과 함께 관람을 했다. 커플 한 복을 입은 노부부는 철부지어린 연인들처럼 장난을 치며 즐거워한다. 그러나 그런 연인들에게도 이별은 어김없이 찾아든다.

거역할 수 없는 이별의 순간, 객석의 관중들의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고인다. 그리고 흐른다. 특별한 연출도 아닌데 사람들의 가슴을 축축이 적신다. 대중적인 영화이면서도 그저 단순한 영화도 아니다. 단지 영화란 영화 그 자체일 뿐이다. ‘님아, 그 강을 ....’ 에서는 그저 사랑의 위대함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의 자세에 대해 말한다.

89세 할머니는 영화 내내 “예쁘다” 란 말을 아예 입에 달고 다닌다. 꾀꼬리가 예쁘고, 들꽃이 예쁘고, 그런 꽃을 머리에 꽂은 98세 할아버지가 마냥 예쁘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또 하나의 언어는 ‘불쌍하다’ 는 것이다. 주워 기른 강아지가 불쌍하다고 울상이다. 할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할아버지 불쌍해서 어쩌누” 라며 울먹인다.

할아버지가 이별의 강을 건너갈 때, 강의 이편에 선 할머니가 내놓는 독백이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추워서 어째? 할아버지 생각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는데” 그 흔 한 “날 두고 가다니 그럼 난 어떻게 살라고...” 같은 통상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안에 밝은 불이 켜졌지만, 몇몇 관객들은 자리를 뜰 줄 모르고 눈물을 글썽이는 것 같다. ‘돌아가신 부모님을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며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필자 역시 한 동안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함께 간 목사님이 “이젠 그만 가야지” 하는 소리에 상념의 시간 속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사랑의 본질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의 태도에 달렸음을 이 영화에서는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간혹 사랑할 만한 상대를 찾지 못해서 혹은 상대에게 문제가 있어서 사랑을 하지 못한다고 쉽게 말을 하곤 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사랑하려는 마음, 혹은 사랑만을 사랑하는 마음에 있다고 본다. 그렇게 사랑하는 마음은 세상 모든 약한 존재들에 대한 연민, 또는 배려에서 시작되는 것이리라. 영화 속 할아버지는 “평생 식사를 하면서 맛없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다. 그저 맛있으면 맛있게 먹고, 맛없으면 조금 먹으면 된다.” 고 했다. 그 장면을 보면서 필자를 생각해보았다.

필자의 경우, 신혼 초에 콩나물국이 밥상위에 올라왔는데 얼마나 맹탕인지, 완전 맹물을 끓인 것이지 국이 아니었다. 그러나 열심히 성의껏 밥상을 차린 아내가 민망하지 않게 하려고 은근히 김치 국물을 부어서 먹었다. 그 이후에도 싱거우면 김치 국물을 붓고, 좀 짜기라도 하며 물을 부어서 먹었지 단 한 번도 타박을 한 적이 없다. 아내 손이 닿은 것은 물마저도 맛있게 먹었다.

또한 한 시간 이상 준비해서 만든 식탁인데 어떻게 5~6분(分)에 식사를 끝낼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에서 아내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30분 정도 먹는다. 밥상머리의 배려가 이쯤 되면 이 영화가 말하고자 했던 사랑의 자격, 사랑의 DNA가 필자에게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면 오만의 극치일까.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인간의 삶에는 그런 강(江)이 흐르고 있다. 삶(生)과 죽음(死)을 둘로 갈라놓는 강이 있다.

생명을 갖고 있는 우리는 언젠가 그 강 앞에 서야 할 때가 온다. 그리고 거추장스런 육신의 짐을 벗어버리면서 그 강을 홀로 건너야만 한다. 그러나 그 길은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다. 강물이 얼마나 깊고, 차가운지, 그리고 강 건너 저편에는 또 무엇이 있는지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다. 아무도 그 강을 되돌아 온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각자의 종교, 신념을 통해 믿거나, 꿈을 꾸며 마음을 다독일 뿐이다. 그래서 강을 건널 때 낯설고, 그래서 때론 두려워하기까지 하고, 그래서 슬퍼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 열 달 동안 있었지만 그 세계를 기억 못하고 설명을 할 수 없듯이 어쩜 그 강 건너 저편에는 또 다른 미지의 세계가 있을 지도 모른다.

종교에서 말하는 천국과 지옥이라는 세상이 있을지도 모른다. 현세에서 선하게 살았으면 천국으로, 악하게 살았으면 지옥으로, 강을 건너는 것이 끝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선하게 살다 강을 건넌 사람들은 그곳의 평화를 알고 있고 있기에 “님아, 그 강을 어서 건너오시오” 라고 손짓 할지도 모른다. 결혼 35주년을 맞이하면서 시집(詩集)을 내려고 일 년 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편지와 함께 넌지시 아내의 손에 쥐어주면서 고마움을 전했다.

35년을 부족한 남편을 내조했는데 돈으로 보상 할 수 있을까 마는 내게는 거액인 그 돈을 모두 신권으로 바꿔주었다. 며칠 전 방송 관계로 기자출신 후배를 만났다. 영화 이야기를 하고 또 필자의 결혼기념일을 이야기하다보니 20여 년 전, 그 후배의 모친 칠순잔치에서 축시를 낭송 한 옛날 옛적 말이 우연하게 나왔다. 이미 모친은 작고하셨고 90세 가까운 부친이 생존해 계시는데 방에는 필자가 낭송한 자작시 한편이 액자에 걸려있다고 한다.

그런데 부친은 지금도 그 시를 보면서 모친을 그리워하고 또 생각한다고 했다. 당시 그 시는 일상의 삶을 노래 한 것이다. 그러나 6.25와 보릿고개를 겪은 대다수의 하객들은 낭송하는 시를 들으며 눈물을 흘렸고 결국은 사회자까지도 목이메일 정도가 되었다. 영화처럼 단순한 내용이었지만 당시의 열악한 환경을 생각하며 공감을 한 것이다. 이제 영화 속 할아버지처럼 언젠가는 우리도 삶과 죽음을 가르는 강 앞에 서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어차피 맞이해야 할 강 이라면, 강 건너 미지의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자. 그리고 그 강을 가뿐하게 걷는 예행연습을 해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결혼기념일’ 저녁 밤늦은 시간에 필자는 자신을 찾아온 문상객에게 드리는 ‘마지막 편지’를 썼다. 강을 건너는 순간까지 ‘티’를 내는 것 같기도 했지만 기분은 예상외로 덤덤했다.

어차피 마지막 글인데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그 글을 보는 문상객들의 표정이 어떨까하는 상상을 해보았다. 몇 번에 걸쳐 문장을 정리한 ‘마지막편지’를 저장했다. 늙어버린 아내의 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주기를 두 손 모아 빌어본다. 그래, 진정한 사랑을 하려면 적어도 노인 부부처럼은 아니라도 자기를 버려야 한다. 진짜 사랑을 한다면 말이다.

조용필의 ‘돌아오지 않는 강’ 을 들었다. 밤공기를 타고 애처롭게 들려오는 조용필의 노래 소리. “당신의 눈 속에 내가 있고/ 내 눈 속에 당신이 있을 때/우리 서로가 행복했노라/ 아~아, 그 바닷가 파도소리, 밀려오는 데/ 겨울나무 사이로 당신은 가고/ 나는 한 마리 새가 되었네.” 아,~ 그렇게 가신님을 어이할꼬. 짝 잃은 한 마리 새가 된 나는 어이 할꼬. 입속으로 우물거리며 그 노래를 부르고 또 불러보았다.

아직은 어둔 밤이지만 곧 밝은 햇살이 떠오르는 아침이 찾아오겠지. 이 시간에도 삶과 죽음을 가르는 강물은 쉬지 않고 흐르고 있지만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눈을 감는다. 육신의 생명이 다하는 곳, 거기에 있는 돌아올 수 없는 그 강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시인.칼럼니스트.국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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