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배 한 척이 난파되어 표류하다가 무인도에 이르렀다. 선원들과 승객들은 그 섬에 착륙하여 선장이 준 곡식을 심으며 다가 올 겨울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곡식을 심기위해 땅을 파다보니 여기저기에서 금은보화가 쏟아져 나왔다. 오래 전 해적들이 탈취한 보화를 숨겨둔 것들이다. 그러자 선원과 승객들은 곡식을 심는 것은 잊은 채 금은보화만 캐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눈발이 날리는 겨울이 다가온 것도 잊고 있었다.

그 후 몇 년이 지난 후 또 다른 배가 섬에 착륙하여 들어가 보니 해골들이 널려있고 그 옆에는 금은보화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금은보화를 캐고 모을 줄만 알았지 겨울 준비와 다가 올 새로운 봄을 맞을 준비는 잊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인간도 이처럼 겨울을 생각하지 못하고 금은보화만 탐하는 어리석음을 범하면서도 책망하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싫어한다.

일부 정치인들과 공무원들이 그런 어리석은 마음을 갖고 공의를 처참하게 짓밟아 버렸다. 정치인이나 공무원은 공인으로서 뜻을 분명히 해야 하고 자신보다는 국가, 국민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욕망을 먼저 채우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바라는 것은 ‘용기’가 되지만 고집을 피우며 잘못을 부인하는 것은 ‘오기’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이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공의’가 땅 바닥에 버려진 사회는 언젠가는 망하게 되어있다. 과연 오늘의 우리 사회가 ‘공의’가 살아있는 곳인지 한 번 쯤은 생각해보자. 세상이 망할 징조를 보이고 있다. 선(善)한 사람들보다 어리석은(偶)사람들이 더 설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비정상, 비상식이 정상, 상식이 된지도 오래 됐다. 오히려 정상이 이상 할 만큼 요지경 속 세상이 되어버린 사회가 됐다.

성경은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 대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을 한다. 첫째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두 번째는 이 땅에서 정신없이 모으는데 일에만 빠져있는 사람이다. 마지막 세 번째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이다.(기독교인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해진 마음을 소유해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善)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선’을 행할 수도 없다. 혹 하나님을 찾더라도 왜곡된 하나님 이미지를 찾은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찾지는 못한다. 자기가 편한 대로 해석을 하고 의미를 부여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 이 땅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한 번은 필히 거쳐야 할 과정이 있다. 즉 죽음이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그런 죽음을 준비하지 않고 천만년 살 것 같은 마음으로 제 고집대로 행하며 완고하고 반항적이며 과욕을 부리는 사람. 어느 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질 명예와 재물은 구하면서도 거역할 수 없는 죽음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도 없다. 많은 사람들은 당장의 눈 앞에 있는 ‘부’와 ‘명예’를 위해 정의를 쓰디쓴 쑥으로 만들어 쓰레기처럼 마구 짓뭉개 버리고 무시한 채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마저 헌신짝처럼 완전히 버렸다.

그리고 이를 나무라는 사람을 미워하고 정직히 말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공의가 짓밟히고 정의가 무시당한 사회는 정직하게 살려는 사람들과 정의를 말하는 사람들을 싫어한다는 것이 어리석은 사람들의 특징이다. CCTV에 다 찍혔는데도 불구하고 오리발을 내밀면서 적반하장으로 검ㆍ경은 공정한 수사를 하라고 호통 치는 의원, 버르장머리 없는 의원들 버릇 고쳐놓겠다고 큰 소리 쳤다가 슬그머니 제 식구 감싸기에 급급한 야당 대표.

노무현 유언 정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주국방에 자존심을 내세우며 좌파세력 결집하려는 의원, 국회에서 노인 폄하 발언을 하고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역정을 내는 의원, 국회에서 대통령이 악수를 청하는데 앉아서 악수하는 의원, 기본자세가 안 되어 있는 야당의 일부 초선의원들, 살인교사를 해놓고도 뻔뻔한 모습으로 부인하는 서울시의원, 탈당도 불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슬그머니 주저앉은 의원.

최고위원 자리에서 사퇴하겠다고 하더니 어느 순간 사퇴를 철회한 의원, 박대통령이 강조하는 공무원연금 시기 조절 발언으로 찬밥신세 만들려는 중진 의원, 개헌론 꺼냈다가 슬그머니 꼬리를 내린 의원, 무상급식 공약으로 당선된 후 돈 없다며 정부에 떠맡기는 일부 뻔뻔한 진보교육감 등 무책임한 발언을 해놓고도 잘못을 시인하지 않고 오히려 책망을 하는 정의로운 사람들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그런 추한 모습을 보는 심정이 안타까울 뿐이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 본인으로서는 억울한 부분도 있을 수 있고 할 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때와 장소에 따라 전해지는 그 의미는 전혀 다르게 전달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어야 한다. 그런 것을 모르는 어리석음 때문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오기를 부리게 되는 것이다. 일부 정당이나 시민단체 등이 법질서를 최대한 활용하려고 교묘한 방법을 다 쓰고 있지만 사실은 법질서를 훼손하는 행위를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물이란 항상 주어진 상황에 따라 조금씩 그 형태가 달라진다. 내가 말하거나 쓴 것을 상대방에게 완전히 전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 의미는 받아들여지는 상대로부터 항상 분산되고 분열되며 자신과 동일성을 결코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물이 샐 때는 약한 곳으로부터 흐른다. 그러나 그것을 방치했을 땐 건물 자체가 붕괴될 수도 있다. 정치나 조직도 마찬가지다.

애초에 잘못을 고치지 않고 방치하거나 무관심하면 더 큰 사건으로 확산되고 치유 될 수도 없게 된다. 요즘 정치권이나 사회단체를 보면 모두가 운동권 단체에서 정치권이나 시민사회단체로 파견 나온 한(恨)이 쌓인 운동가 같이 보일정도로 투쟁만을 하려고 한다. 투쟁을 우선으로 하는 운동가에게 단점은 그른 것을 지적은 할 수 있어도 그에 대응할 수 있는 정책이 없다는 것이다. 편견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큰 단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수의 국민들은 운동가를 정치인으로 착각하고 뽑아주면서 정치가 개판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 또한 어리석은 국민들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 안전 등 너무나 많은 것을 경험했다. 한 전문가를 통해 배에는 평형수가 배 밑에 채워지면서 배가 기울 때 복원력의 역할을 함으로써 안전한 항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월호의 경우 수입을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 배에 화물을 많이 선적하기위해 의도적으로 평형수를 빼내어 사고를 불렀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평행수를 빼내듯 공의와 도덕, 그리고 정의가 마비된 사회는 결국 배가 복원력을 잃어버림과 다를 바 없다.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를 세우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공의의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삶을 통해 나타낼 수 있도록 해야 밝은 사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낭떠러지라도 가 본 사람은 안다. 반드시 내려가는 길이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주장만 고집한다면 평생 한(恨)을 품고 후회를 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전부를 보려면 동전의 양면을 보아야 한다. 또 똑같은 길이라도 반대로 오면 오르막길은 내리막길로 바뀔 수 있다. 방향을 바꾸면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죽음을 내다보며 사는 삶을 살자. 아울러 탐욕으로 인해 불행을 당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는 말자.

[시인.칼럼니스트.국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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