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속 안철수 의원이 다시 한강을 건너 여의도에 입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었다. 영희와 바둑이가 없는 무소속 의원 안철수는 정치를 경멸했다. 그는 학자출신으로 정치무대에서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을 부각시키면서 새 정치의 바람을 일으키며 정치를 공박했다. 그런 안철수는 새 정치의 구원자로 자처하고 나섰다. 그는 정치를 말하면서 비정치적 언어를 선호 했다.

그가 많이 구사한 단어는 ‘미래’다. ‘희망’ ‘선의’ ‘진심’을 말했다. 그런 도전 방식과 언어 선택은 기성질서와의 차별화를 강화했다. 안철수는 늘 작은 입술로 결연함을 표출했다. 그는 “시대의 숙제를 감당하려고 한다.”고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번복했다. 하지만 단호함이 넘치지 않도록 말의 수위를 항상 조절하며 말을 아꼈다. 말을 치장하는데 주력하면 감성 정치의 전파력은 확장 될 수 있다. 그러나 비전과 실질은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 연유에서 일까. 안철수의 새 정치에 새로운 것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몇 해 동안 ‘변화, 국민적 열망, 정치쇄신, 정책 경쟁, 민생 경쟁’을 거론했다. 귀에 못 박혀 아주 익숙해진 말들이다. 그러나 그의 어휘들은 과거 이인제(97년), 정몽준(2002년), 문국현(2007년)이 대선에 나서면서 썼던 말들이다. 학자라서 일까. 그의 연설 끝은 항상 소설가의 말로 장식하기도 한다.

안철수는 늘 “정치가 바뀌어야 우리 삶이 바뀔 수 있다.”고 강조해서 말한다. 모범 답안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이제 평범한 정치 레토릭이다. 국민은 안다. 안철수의 말은 당연하지만 언제나 그 말들은 모호하면서도 교묘하다. 정치에 신물이 난 많은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누가 뭐라 해도 이제는 안철수가 교육자 이전에 정치인이다. 정당을 만들던 무 공천이던 정치권에서 주역이 되었다.

그래서 그에게도 정치혁신의 책임과 의무가 주어졌다. 상대 진영의 변화를 요구하기에 앞서 늘 주창했듯 새 정치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를 제시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관전자, 국외자인양 말을 했다. 그것은 오만이고 자기 착각에 빠져있는 것이다. 안철수는 “네거티브는 최악의 구태”라고도 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네거티브와 검증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그런 안철수는 “오랫동안 전세살이를 해봐서 집 없는 설음을 잘 안다.” 라고 말했다.

그러나 26세 대학원생 때 판자촌 딱지를 샀다는 사실이 뒤늦게 드러나면서 많은 국민들을 속였다. 그 설음의 대부분은 서민, 정치에 절망하는 사람들이었다. 안철수가 늘 소중하게 거론하는 빈민계층이다. 그런데도 유권자들은 자신들을 배반하며 기만한 그에 대해 4년을 위한 투표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단 하루를 위한 선택의 투표를 한 것이다. 큰 과오를 범했지만 자신들의 선택이 잘 못 되었는지도 모르고 여전히 언어의 마술사의 최면에 깊이 빠져 있다.

정치는 신뢰다. 신뢰의 정치가 새 정치다. 정치 불신은 정치인의 이중성, 언행 불일치에 비롯된다. 서울대학교 부인의 교수 임용에 대해서도 특혜 문제로 논란이 있었지만 국민을 무시해서인지 한 마디의 해명도 없을뿐더러 교수로 있다. 안철수는 ‘진심의 정치’를 약속했다. 진심의 정치는 진정한 소통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이미지 경쟁력은 소통이다. 그러나 그의 실제 소통은 선별적이고, 일방적이고 정치공학적인 면모를 보이고 있을 뿐이다.

자신이 알리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싶은 것만 골라서 맛만 보여주었다. 기자들에게 그렇게 했다. 늘 사람들을 흥분시킨 후 슬그머니 허탈하게 만드는 선수다. 그의 정책은 겉보기에는 화려한데 속은 텅 비어있다. 안철수의 새 정치는 소통 방식의 변화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안철수의 답변은 언제나 평범하다. 교과서식의 답변이다. 그러면서도 결정적 대목일 땐 엉뚱하게 말을 돌린다. 그리고 회피한다.

몇 해 전 대선 때도 안철수는 정치경험과 관련, “사장이 된 후 수많은 실수를 했어요. 다만 절대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고 실수를 통해서 배워나갔습니다. 교수가 된 후에도 처음엔 강의를 잘 못했는데…. 고쳐나가서 카이스트 대학원에서 최고 수준의 강의 평가를 받는 교수가 될 수 있었죠.” 이는 정치경험이 없는데 대통령 역할을 잘 해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대답한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또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대통령의 실수는 결정적이다. 교수, 사장의 실수와는 차원이 달라도 완전히 다르다. 대통령의 세계는 사소한 실책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철수의 비유는 대통령 자리의 엄중함과는 거리가 멀다. 미안한 말이지만 국가 경영 리더십의 격조와 크기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안철수의 생각’ 을 보아도 안철수의 생각이나 비전이나 또 무엇을 구상하는지를 찾을 수가 없다.

그저 현실적인 원론적인 ‘평가’ 가 있을 뿐이다. 다만 어떤 출판사인지 덕분에 돈 좀 벌었겠구나 하는 생각만 남아있다. 안철수가 새 정치의 아이콘으로 부상하는 이유는 기존 정치권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구태 정치의 책임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철수 바람도 불어와 새누리당과 민주당을 긴장시키기도 했다. 낡은 정치의 멍에로부터 자유로운 안철수는 가장 과감하게 판을 뒤집는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게 되었다.

문제는 이상(理想)과 현실(現實)사이의 간극이다. 정당에 대한 개념이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정치를 너무 가볍게 보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안철수가 신당을 창당하겠다고 당명까지 공고한 것이 엊그제 인데 갑자기 민주당과 합당을 하겠다고 나섰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리송하다. 더구나 2석에 불과한 무소속파가 민주당을 행해 ‘당 해체’ 와 변화를 요구하며 합당을 하잔다.

이제까지 주장하던 새 정치의 명분을 스스로 저버리며 정치권의 판도를 뒤흔들어 놓고 있다. 무소속에 고개 숙이는 민주당에 어떤 변화를 말하는지, 어느 정도 변화가 되어야 합당하겠다는 건지 종 잡을 수가 없다. 더구나 좀 전에까지도 싸잡아 썩은 정치 집단으로 매도했던 민주당에 추파를 던지며 손을 내밀고 있으니 신당에 참여키로 했던 사람들을 무색하게 하고 논란이 가중되면서 민주당과의 합당과 관련한 위원회가 무산 되었다.

일그러진 그 얼굴에 옷만 바꿔 입는다고 달라지는 게 무엇인가. 이권을 생각하며 여전히 국민을 기만하는 행위를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6.4 선거가 불과 4개월 남짓 남았지만 민주당과 안철수와의 갈등은 점점 심해져 또 한 차례 진통이 예상되고 있다. 자신의 새 정치 정책을 포기하고 민주당에 업히거나, 민주당이 자신의 정책을 당론으로 채택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데 역사가 있는 거대 야당인 민주당이 안철수에게 당권을 쉽게 넘겨주겠느냐 하는 것이다.

또 당을 해체하려면 수백 억 원에 달하는 정부보조금을 받지 못하는데 그 위함을 감수하고라도 민주당이 당을 해체하겠는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가상적이기는 하지만 정권 창출을 위해서는 안철수가 민주당에 얼굴을 팔던지 민주당이 안철수 집권의 들러리를 서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정책이야 어찌 되건 권력만 나누려고 한다면 그야말로 야합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또 현 시점에서 무(無)공천은 ‘눈 가리고 아웅이다.’ 어떤 명분이던 정당 색깔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공천은 정당정치의 원칙에도, 현실에도 전혀 맞지 않는다. 국민과의 약속도 좋지만 잘 못 된 것을 알면서도 고집을 부리는 것 또한 국민을 우롱하는 처사다. 오동일엽(梧桐一葉)이란 말이 있다. 오동잎 하나 지는 걸 보고 가을이 왔음을 안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를 보면 열을 알게 되는 것처럼 민주당과 안철수의 합당의 결과가 뻔하다. 새 정치는 구호일뿐 그 의미가 없어졌다. 자신이 그토록 욕을 하던 정당과 합류 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도 국민과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 아닌 가. 안철수가 말하는 통합이 정치쇄신. 새 정치인가. 이러니 안철수의 자질론이 나올 수밖에….

[시인.칼럼니스트.국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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